이 기사는 2024년 07월 04일 07:1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2012년 3월 26일 경기도 이천 하이닉스 본사 강당.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권오철 사장 등 2000여명의 임직원이 한데 모였다. SK '행복날개'를 단 하이닉스의 새 출발을 알리는 간담회 자리였다. 40여명 남짓 기자들도 함께 했다. 공개석상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던 최 회장을 처음 봤던 날이다.연단에 올라 선 최 회장이 입을 열었다. 가냘프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메시지는 선명했다. "1978년 선경반도체를 설립하고 반도체 산업 진출을 모색했다가 석유파동으로 꿈을 접었던 SK가 30여년이 지난 오늘 메모리반도체 세계 2위 하이닉스를 새 가족으로 맞이했습니다. SK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발걸음입니다."
박수 갈채를 받은 외침이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SK의 주력 사업은 통신, 석유·에너지인데 반도체 기업과 무슨 시너지를 내겠다는 것인지. 밸류체인이 그려지지 않는 기업을 왜 3조4000억원 거금을 들여 샀는가. 최 회장조차 '숙제이자 난제'라고 말했던 부분이다. '궁합이 맞는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횡령 혐의 재판을 받고 있던 최 회장의 사면 목적 인수란 말까지 돌았다. 수조원대 부채를 쥔 하이닉스는 정부의 '앓던 이'다. 1년 뒤 최 회장이 법정구속되면서 루머로 그친 이야기다. 다만 인수 배경을 향한 의구심이 그럴듯한 설들로 계속 이어졌다. 정재계 모임에서 외화벌이 격려가 있었는데 SK는 내수에 한정돼 있어 최 회장은 소외됐고 그래서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내부 고위임원들이 다 반대를 했는데 밀어붙였다 등등 '카더라'가 난무했다. 하이닉스 인수가 그만큼 의아하긴 했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하이닉스는 이제 특정 분야에서 삼성전자를 넘어설 정도의 기업이다. 기존 사업과 시너지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SK하이닉스 반도체 사업 자체가 그룹사 코어다.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등 레거시 계열을 압도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마이크론으로 헐값에 팔려 생산기지로 전락할 뻔했던 하이닉스를 최 회장과 SK가 품고 키워낸 결과다.
역대급 위기를 겪고 있는 SK가 다시 비상할 것이란 확신이 드는 것도 이 기억 때문이다. 당시 원매자로 거론됐던 A사 B사 등 다른 후보군들이 품었다면 하이닉스가 과연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까. 업황 사이클을 잘 탄, 단지 운대가 좋아서 성장한 게 아니다. SK의 과감한 투자와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의 HBM과 같은, 삼성을 넘어선 저력은 탄생하지 못했다.
SK그룹이 추진 중인 리밸런싱 절차도 하이닉스 인수처럼 단호하게 이뤄져야 할 때다. SK온 매각이든, SK㈜와 SK스퀘어 합병이든, 반도체 사업 중심으로 대전환이든 틀을 깰만한 변화가 필요하다. 최 회장의 선견지명이 담겼던 하이닉스 인수처럼 SK가 포트폴리오 정리 절차에서도 빛나는 결정을 보여줬으면 한다. 12년 전 보여준 파격적이고 과감했던 오너의 결단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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