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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과 연암의 절연, 삼성과 LG의 동맹 [thebell desk]

김장환 산업2부장공개 2024-03-12 09:13:59

이 기사는 2024년 03월 11일 07:2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호암(이병철 삼성 회장)과 연암(구인회 LG 회장)의 인연과 훗날 절연은 재계에 유명한 일화다. 이 회장의 장남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을 통해 상세한 이면의 스토리가 업계에 공개됐다. 그가 쓴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 실린 이야기다.

1968년 어느날, 삼성 소유 안양골프장에서 이 회장과 구 회장(당시 금성), 이맹희 회장이 동반 라운딩을 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이 회장은 구 회장에게 "우리도 전자 산업을 하려고 하네" 말을 꺼냈다. 그러자 구 회장은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더니!"라며 화를 벌컥 냈다고 한다. 쏘아붙이는 그의 말에 민망해진 이 회장은 그 길로 골프장을 떠났다.

지연과 학연, 혈연으로까지 묶여 있던 이들의 관계 단절은 그렇게 단순간에 났다. 호암과 연암의 인연은 경남 진주시 지수초등학교 같은 반에서 동문수학하며 시작됐다. 초일류 기업을 키워낸 후에는 사돈까지 맺었다. 1957년 이 회장의 둘째 딸 이숙희 씨와 구 회장의 셋째 아들 구자학 아워홈 회장이 화촉을 올렸다. 하지만 삼성의 전자 진출 후에는 이 씨조차도 친가와 연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2015년 '백색가전 명가' LG라고 하기에는 삼성에 체면을 크게 구긴 사건이 하나 터졌다. 조성진 전 LG전자 사장 등 임원 3명이 삼성전자로부터 "전시된 제품을 악의를 갖고 고의적으로 망가뜨렸다"는 의혹으로 검찰 고발 당한 일이다.

당시 이들은 독일 베를린 가전매장 두 곳에 방문해 삼성전자가 내놓은 신제품 '크리스털블루 세탁기' 3대의 도어 연결부(힌지) 파손 혐의를 받았다. 대법원까지 갔던 사건은 2016년 말 무죄로 종결됐다.

해프닝으로 끝낼 수 있던 사안인데도 '갈때까지 가보자' 붙었던 이유는 50년 넘는 기싸움에 있었다. 삼성전자는 1969년 전자 부문 진출을 선언한 뒤 이듬해부터 금성(현 LG전자)이 장악하던 TV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전략은 '물량 공세'. 긍정적 면모보다 소모적 출혈로만 볼 수 있는 싸움을 그 뒤로 수십년 동안이나 해왔다.

TV뿐 아니라 냉장고, 앞서 큰 사건이 된 세탁기 등 가전사업부문 전반에서 맞붙었다. 기술 개발 경쟁이라면 모르겠으나 '기술 빼돌리기'에 가까운 인력 빼내가기가 이어졌다. '스카우트 금지' 협약을 맺고서야 잠재울 수 있었던 전쟁이다. 수억원을 쏟아부은 상대방 비난 광고 등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2024년 LG디스플레이는 삼성전자에 5년간 화이트(W) OLED 패널 수백만장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알렸다. 삼성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퀀텀닷(QD) OLED TV를 선보이며 LG전자의 W OLED TV를 넘어서려 했다. 문제는 QD OLED가 W OLED보다 단가가 더 높고 생산시설 캐파를 늘리는데도 보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장비였다는 점이다.

먼저 손을 내민 건 LG전자다. LG전자는 2023년 1월 시장에 내놓은 OLED 노트북 패널을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공급받았다. 원공급사 LG디스플레이는 대형 OLED 부문에서는 강자이지만 중소형 OLED 개발은 아직이다. 대형과 중소형 OLED는 동일한 기술을 적용해 만들 수 없다.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는데다 채산성도 낮아지기 때문이다.

LG디스플레이는 2022년 한 해 2조원 넘는 손실을 냈던 와중에 기술 개발 비용을 쏟기 어려웠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삼성으로부터 패널을 공급받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삼성 역시 LG로부터 패널을 받기로 했다. 호암과 연암이 절연한지 55년만에 그들이 세운, 후대가 운영하는 기업은 다시 손을 맞잡았다.

호암과 연암이 지금껏 생존해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후손들의 결정을 호되게 질책했을까. 오히려 삼성과 LG가 동맹을 맺고 윈윈할 수 있는 사업 영역을 더 찾아내지 않았을까. 이들은 기업의 생존을 개인의 자존심, 가족의 연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던 거목이었다. 생존의 격변기인만큼 양사의 손잡음이 주는 의미가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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