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기사는 2010년 05월 18일 17:1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전통적 은행 비즈니스는 예금을 받아 대출로 운용하는 것이었지만, 현대의 은행들은 자본시장을 활용한 자금 조달과 운용을 크게 확대했다. 대규모로 은행채를 발행해서 회사채에 투자하고 각종 파생상품에 보증을 제공하는 식이다. 어느덧 자본시장 비즈니스는 은행의 핵심 비즈니스가 되었고, 은행은 자본시장의 흐름을 좌우하는 큰 손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 위기를 계기로 이러한 은행과 자본시장의 지나친 접근이 위기를 증폭시킨다는 반성이 제기되었다. 자본시장 비즈니스와 관련된 무리한 레버리지 확대와 유동성 부족도 문제지만, 주요 금융시장이 복잡한 금융거래로 연결됨으로써 경기순응적 디레버리징(Pro-cyclical deleveraging)을 야기한 점이 특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은행과 자본시장의 선 긋기는 최근 국제적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뉴노멀의 핵심 기조가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안전해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성장과 수익 창출의 주요 동력인 자본시장 비즈니스를 상당부분 접어야 하는 은행들의 입장에서는 그 부담감이 결코 작을 수 없다.
지난 14일 한국은행 금융협의회 발표문을 보면 은행세(bank levy), 볼커룰(Volker rule), 자본규제 강화 등 뉴노멀에 대한 우리나라 은행장들의 우려가 절절하게 묻어난다. 국제적 흐름은 인정하지만 규제의 강화로 인한 경영상 어려움을 토로하며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배려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뉴노멀로 인해 우리 은행들의 성장 전략은 상당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이런 방향 전환이 반드시 부정적일까? 역사에는 곧잘 절묘한 반전이 숨어있다.
◇ 데자뷰(deja vu), 엔론 위기 이후
뉴노멀은 최신 시사용어지만 그 저변의 흐름은 어디선가 본듯하다. 뉴노멀의 테마(레버리지, 유동성, 투명성)들은 지난 엔론 위기 이후 미국 기업의 신뢰 재구축 당시의 테마와 흡사하다. 메인스트리트나 월스트리트나 위기의 법칙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의 장외금융거래의 등록 의무화 움직임은 2002년의 사베인스-옥슬리(Sabanes-Oxley)법과 닮았고, 바젤Ⅲ의 LCR(Liquidity coverage ratio)은 당시 신용평가사의 LRA(Liquidity risk assessment)와 기본적인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더불어 금융위기의 가장 근본이 되는 레버리지 이슈 또한 마찬가지다.
투명성은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유동성과 레버리지는 재무지표로 간단히 보여줄 수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2002년을 전환점으로 미국 제조업의 레버리지와 유동성 리스크 부담은 크게 낮아졌다. 세상은 훨씬 안전해졌다.
일반적으로 안전비용의 증가가 기업의 성과를 잠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 그림은 2002년 이후 미국 제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미국 제조업이 좋은 성과를 기록한 배경에는 적극적인 해외진출과 과당경쟁 자제 등의 경쟁전략의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경쟁전략은 보수적 재무정책이 함께 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들이다.
최근의 심각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조업들 예상 밖의 선전을 하고 있다. 엔론 위기 이후의 위기대응 능력 강화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 우리나라 신용카드의 체질 전환
우리나라에서도 위기 이후 강화된 경영체질로 이번 위기를 잘 대처하고 있는 사례를 여럿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지난 2003년 우리 경제를 뒤흔들었던 신용카드 산업을 들 수 있다. 이번 위기의 와중에서 카드사들의 수익성, 건전성, 유동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자금조달은 위기 이후 오히려 안정성이 더 강화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카드 위기 이후 대출업무(현금서비스, 카드론)를 줄이고 결제업무(일시불)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개편하면서 카드사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성장성과 수익성 측면에서 미래가 너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결제업무는 대출업무에 비해 명목수익률이 낮다. 하지만 카드사들은 개선된 자산건전성을 바탕으로 대손비용을 비롯한 각종 경비를 줄여 이를 극복했다. 위기를 겪으면서 정립된 게임의 법칙도 무리한 경쟁비용의 증가를 막았다. 이런 아픔과 성찰을 통해 결국 수익성뿐만 아니라 건전성과 성장성까지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체질로 변신한 것이다.
뉴노멀의 거대한 변화를 앞둔 은행들에게 이런 사례들이 다소나마 위안과 교훈을 될 수 있을까? 당사자가 아닌 국외자의 입장에서 조심스럽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싫든 좋든 변화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과 자본시장의 분리는 은행의 짐을 덜어준다. 자본시장의 극심한 변동성에서 한걸음 벗어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수년간 우리 은행들을 피폐하게 했던 확장 경쟁과 글로벌 거대금융자본으로부터의 압박도 아무래도 잦아들 것이다. 불확실한 새로운 고객보다 익숙한 기존 고객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음 먹기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best clicks
최신뉴스 in 전체기사
-
- [북미 질주하는 현대차]윤승규 기아 부사장 "IRA 폐지, 아직 장담 어렵다"
- [북미 질주하는 현대차]셀카와 주먹인사로 화답, 현대차 첫 외국인 CEO 무뇨스
- [북미 질주하는 현대차]무뇨스 현대차 사장 "미국 투자, 정책 변화 상관없이 지속"
- 수은 공급망 펀드 출자사업 'IMM·한투·코스톤·파라투스' 선정
- 마크 로완 아폴로 회장 "제조업 르네상스 도래, 사모 크레딧 성장 지속"
- [IR Briefing]벡트, 2030년 5000억 매출 목표
- [i-point]'기술 드라이브' 신성이엔지, 올해 특허 취득 11건
- "최고가 거래 싹쓸이, 트로피에셋 자문 역량 '압도적'"
- KCGI대체운용, 투자운용4본부 신설…사세 확장
- 이지스운용, 상장리츠 투자 '그린ON1호' 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