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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막혀버린 빠른 길 [thebell desk]

김장환 산업2부장공개 2025-01-03 09:52:42

이 기사는 2025년 01월 02일 07:1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한강의 기적' 근간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폐허였던 나라가 '선진화 진입' 기준점으로 삼았던 국민총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달러를 1977년 넘겼다. 고작 20년 남짓에 이룬 쾌거다.

초고속 압축성장의 근원은 훗날 빨리빨리 '병(病)'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과거 발생한 각종 대형 사고 다수가 '졸속' 문제에서 비롯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느림보' 문화 속이었다면 한국을 성장시킨 기업들의 질주도 꿈조차 꾸기 어려웠을 수 있다.

미국계 기업에서 삼성전자로 이직해 근무하다 몇 해 전 퇴임한 한 임원은 "삼성의 1등 밑천도 빨리빨리"였다고 했다. 삼성전자로 처음 옮겼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의사 결정과 진행 과정의 '신속성'이었다고. 전 직장에선 본사 현지 시차에 맞춰 보고하고 또 시차에 맞춰 피드백을 받는 '느림'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사소한 사안이어도 고객사와 최종 조율까지 마치는데 2주가 넘는 게 보통이었다는 후문이다.

삼성전자에서는 휴일 발생한 이벤트여도 의사 결정과 결과물 도출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시차가 있는 외국 고객사의 요청에도 '늦어도 이틀 내' 의결 사항을 전해줬다고 한다. 외국계 기업 근무 당시 2주 넘도록 딜레이가 됐을만한 사안도 삼성전자에서는 최단 시간 내에 해주니 고객들의 만족도와 신뢰도는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는 삼성전자의 최근 경영 위기의 근원을 과거 직접 경험했던 '신속성의 상실' 탓이 크다고 진단한다. 그 배경으로 지목한 게 '주 52시간 근로 제도'다. 원인을 한 곳에서만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근로 시간에 대한 제도적 벽이 경영상 다양한 난관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글로벌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파운드리 최대 경쟁자 대만 TSMC는 직원 하루 근무시간을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다. 엔지니어 경우 특별수당을 주고 늦은 시간까지 근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다. 법적으로 노사 협의에 따라 근로시간을 정할 수 있게 해뒀다. 고객이 원한다면 언제든 노동 시간을 늘려 대응할 수 있다.

AI 칩으로 세계를 주름잡은 엔비디아의 성공 배경은 '고강도 근무에 뒤따르는 파격적인 보상'이 거론된다. 미국의 법정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지만 연장근로 시간 제한 없이 1.5배 임금 보장만 요구한다. 고위임원과 전문직 등 근로자는 규제 적용 대상조차 아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통해서다.

노동시간을 늘려 생산량을 향상하는 경영전략은 단기 효과만 낼 수 있을뿐 조직이 오래가기 힘들다는 반대 논리도 있다. 혹사하면 좋은 인재를 해외 경쟁사로 놓칠 수 있다는 게 그 근거다. 요즘 젊은 직원들은 '돈보다 워라벨'을 우선시한다는 배경도 있다.

정작 '고강도 노동 없이는 높은 성과 보상도 없다'를 철칙을 추구해온 엔비디아와 TSMC의 현실을 보면 꼭 들어맞는 말도 아니다. 2023년 엔비디아의 이직률은 3%, TSMC는 6% 정도다. 삼성전자의 이 기간 이직률은 13%다. 단순 비교는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객관적 데이터로 봤을 때 주 52시간을 지켜온 쪽의 근로자 수명이 더 짧았던 셈이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핵심으로 한 반도체 특별법이 지난해 11월 국회 발의됐으나 연내 통과하지 못했다. "한국의 스피드가 중국과 일본보다도 늦어졌다", "젠슨 황이 한국 기업에 좀 더 빠른 제조를 요청했지만 들어주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지만 정쟁으로 적기를 또 놓친 분위기다. 2025년 새해에는 앞선 말들에 먼저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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