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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철선과 격벽구조

강종구 부장(DCM팀장)공개 2012-03-13 08:41:56

[편집자주]

자본시장 발전에 신용평가는 인프라와 같은 존재입니다. 서브프라임사태로 신용평가의 공정성이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것도 신용평가의 중요성을 재차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더벨은 신용평가를 포함해 크레딧시장의 전반을 전문가의 날카로운 시각을 통해 분석합니다. 신용이슈 등 일련의 현상에 대해 폭넓은 이해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2012년 03월 13일 08:4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거품 붕괴는 통상 주전(주택전문금융회사)사태라고도 한다. 가까스로 위기를 버텨가던 일본의 은행시스템이 1995년 주전의 붕괴(7.6조엔 손실)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주전과 우리나라 저축은행 및 상호금융은 영업구조가 비슷했다. 가계대출에 주력하다가 부동산 거품 팽창기에 건설부동산업 관련 기업대출을 크게 늘린 것이다. 하지만 자금조달 구조는 전혀 달랐다. 우리 저축은행과 상호금융이 자금을 대부분 예수금으로 조달한 반면, 일본의 주전은 은행대출에 의존(98%)했다. 결국 격벽구조(Partition wall)를 고수한 우리나라는 저축은행 문제가 은행의 신용이슈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인계철선(trip wire) 구조였던 일본의 은행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격벽구조와 인계철선은 금융시장 구조와 관련한 핵심적 화두다. 우리는 상당히 엄격하게 격벽구조를 유지했지만, 미국은 유럽과의 경쟁을 의식해서 대표적 격벽구조인 글래스-스티걸법을 완화했다가 크게 고생했다. 당연히 바젤Ⅲ와 볼커룰 등 최근의 금융시스템 개혁 논의도 금융시장간 인계철선 축소와 격벽구조 강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 은행정기예금 담보부 ABCP

지난 2월 CP시장 잔액이 100조원을 넘어섰다. 시장의 확대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 CP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하다가 2010년 들어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 증가액의 2/3가 미공시CP였다. 미공시CP의 기초자산 내역은 제대로 공개되어 있지 않지만 총액의 2/3 가량이 은행정기예금 담보부 ABCP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2010년 이후 CP시장 성장의 절반 가량이 은행정기예금과 연관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정기예금 담보부 ABCP는 지난 2월, 규모가 1조원을 상회하는 초대형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등 최근 들어 더욱 번성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ABCP프로그램이 은행의 정기예금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지난 6개월간의 미공시CP 증가액은 11.4조원, 같은 기간 은행 정기예금 증가액은 14.6조원이었다. 결국 미공시CP의 2/3가 정기예금 관련이라면, 은행 정기예금 증가액의 절반 정도를 ABCP프로그램이 소화했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정기예금 수요자가 은행과 직거래하지 않고 굳이 수수료를 물어가면서 ABCP형식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특정 거래상대방에 대한 편중이슈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연스럽게 인계철선 이슈가 떠오른다. 금융시스템 개혁 논의의 한 꼭지가 바로 도매자금조달 편중에 대한 유동성 규제이기 때문이다. 은행의 자금조달이 특정 거래상대방이나 특정 금융상품에 의존할 경우 자칫 유동성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ABCP의 정보공시

금융위기, 특히 유동성위기 뒤에는 반드시 정보투명성 이슈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뻔히 보이는 리스크에는 어지간해서 당하지 않을 테니까.

CP시장은 낮은 정보투명성 때문에 여러 차례 금융위기의 파이프라인으로 오용되기도 했지만 2005년 이후 다양한 경로로 정보유통이 이루어지면서 투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그리고 이런 정보투명성 개선은 금융시장의 리스크 관리에 알게 모르게 큰 기여를 했다.

돌아보면 건설PF 이슈가 공론화된 것은 2007년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무려' 1년이 앞선다. 그만큼 손실과 위기의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단초가 바로 건설PF ABCP의 급증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데이터가 논리를 만들고 나아가 예방적 대응을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시장과 물길은 막히면 돌아서 다른 길을 찾는 법이다. 새로운 길에도 가치창조와 함께 얼마간의 리스크가 있기 마련이고, 다시 새로운 가이드라인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금융혁신과 가이드라인의 정반합이 시장 발전의 역사다.

미공시CP 이슈도 이런 과정의 산물이다. CP시장의 정보투명성 개선은 금융투자협회, 은행연합회, 증권예탁결제원 등에 집적된 CP발행 데이터와 평가회사가 제공하는 개별 CP평가보고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전에도 평가보고서가 없는 경우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예외적인 사안이어서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2009년부터 미공시CP가 슬슬 확대되더니 이제 '통계는 있으되 분석은 불가능한 사각지대'가 CP시장의 1/4(25.8조원)을 차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발행자의 평가내용 미공시 요구에 평가사가 순응하는 것이지만, 미공시 요구가 타당한 경우도 있어서 무조건 평가사의 공시를 의무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래서 최근 추진중인 신용평가 제도개선 방안에서도 금융투자업자가 '공시된 신용등급'만 활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물론 신용등급 공시만으로 미공시CP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등급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초자산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평가사의 공시를 일정한 정보공개 범위를 정하여 금융투자협회를 통해 공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이 방안들이 모두 현실화되면 미공시CP 이슈는 상당부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시행시기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금융투자협회가 지난 1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ABCP 거래내역 공시'가 가장 유력한 대안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아직은 정보원의 범위가 제한적이고 가장 중요한 ABCP의 기초자산도 기타나 유가증권 등 포괄적으로 기재한 경우가 많아서 정보활용에 제약이 크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사안의 무게를 감안하면 보다 각별한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 장기CP

장기CP 이슈도 만만치 않다. 지난 2월말 미상환 CP 가운데 발행만기가 365일을 초과하는 CP의 비중이 35%였다. 365일까지 합하면 41%에 달한다. 최장만기는 무려 2,113일이다. 자본시장법시행령 개정으로 CP만기 규제가 사라진 이후 간헐적으로 등장하던 장기CP가 이제는 큰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은행과 자본시장 사이에만 격벽구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장단기금융시장 사이의 격벽구조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장단기금융시장의 구분이 모호해지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유지는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장기CP는 다른 문제도 야기한다. 오랜 기간의 논의와 준비를 거쳐 내년부터 새로운 CP로 단기사채가 도입된다. 단기사채는 기존 CP인 기업어음과 거래의 성격이 비슷하지만 만기를 1년 이하로 뚜렷이 제한하고 있다. 더불어 선진시장처럼 발행한도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발행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높인다. 과거 수 차례 금융위기의 연결고리로 작용했던 CP시장의 약점들을 전면 보완하는 것이다.

단기사채 도입과 관련한 핵심 이슈의 하나가 '기존 기업어음 시장에서 단기사채 시장으로의 순조로운 이행'이다. 발행한도는 기업어음과 단기사채에 사실상 공통 적용되고, 발행정보 이슈는 이미 상당부분 해소된 상태라 발행기업과 거래 금융회사가 굳이 무리해서 기업어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장기CP가 큰 흐름을 형성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굳이 기업어음으로 남아있을 상당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물론 CP시장이 모두 기업어음에서 단기사채로 이행한다면 장기CP는 저절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CP시장이 양분된다면 그에 따른 혼선과 비효율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공부와 리스크 관리는 평소에 하는 것이다. 큰 일이 닥치면 아무리 총력을 기울여도 한계가 있다. 자유는 끊임없는 감시의 대가라고도 하지 않던가? 금융시장의 평화와 안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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