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일동제약 지분인수 'M&A 포석' 맞나 '단순투자 vs 경영권확보' 성격 모호..M&A 걸림돌도 산적
정호창 기자공개 2012-12-14 11:07:04
이 기사는 2012년 12월 14일 11:0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녹십자의 일동제약 지분 인수로 제약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하지만 뒷말만 무성할 뿐 제약업계와 인수합병(M&A) 업계의 그 누구도 녹십자의 진의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거래가 전격적으로 이뤄진데다, 녹십자가 손에 넣은 지분의 규모도 어정쩡해 투자성격을 규정하기 애매한 탓이다. 현재로선 확실한 목표와 세밀한 전략 없이 투자가 집행돼 시장에 혼선을 준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13일 금융감독원 및 인수합병(M&A) 업계에 따르면 녹십자는 지난 10일 시간외 대량매매(블록딜)를 통해 환인제약이 보유하던 일동제약 주식 177만주(지분율 7.07%)를 146억 원에 인수했다. 이번 거래로 녹십자는 일동제약 지분 15.35%를 보유한 2대주주가 됐다. 일동제약의 최대주주는 윤원영 회장 등 현 경영진이며 지분율은 27.19%이다.
지분 인수 사실이 알려진 후 녹십자는 "단순투자 목적일 뿐 경영권에는 관심 없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지만, 시장에선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단순투자를 위해 수백억 원의 자금을 집행하는 것은 '녹십자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녹십자는 재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보수적이고 실속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를 가진 곳이다. '개성상인'의 후예로 꼽히는 창업주 고(故) 허채경 회장의 유지가 이어지며 수십 년간 '내실경영', '우보(牛步)경영'을 고집해 온 결과다.
일동제약 지분 인수에 녹십자가 투자한 금액은 총 305억 원이다. 지난 3월 현대라이프생명보험(옛 녹십자생명보험)이 갖고 있던 일동제약 지분 8.28%를 인수하는 데 159억 원을 투자했고, 이번 환인제약과의 거래에 146억 원이 들었다.
녹십자는 여태 계열사 설립에도 100억 원 이상을 투자한 경우가 거의 없다. 지난 8월 150억 원을 출자한 이노셀 정도에 불과하다. 일동제약 지분 인수를 '단순투자'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 일동제약 인수 위한 포석? 시너지 있으나 크지 않아
단순투자가 아니라면 이번 거래는 정말 시장의 예상처럼 일동제약 경영권 인수를 위한 포석으로 봐야할까.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정답으로 보긴 어려운 추론이다. 녹십자와 일동제약의 결합이 시너지를 낼 순 있으나 효과가 제한적이고, M&A 추진에 걸림돌도 많아 득보다 실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약업계에서 녹십자와 일동제약의 M&A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는 두 회사의 사업구조가 달라 쉽게 시너지를 낼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녹십자는 일반 제약사와 달리 혈액제제와 백신 등 비화학물의약품이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반대로 일동제약은 '아로나민' 등 일반의약품이 22%, 제너릭(복제약)이 66%를 차지하는 등 화학물의약품 위주의 매출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두 회사가 결합하면 매출구조의 편중을 상쇄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두 회사의 매출구조 차이만으로 시너지를 계산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셈법이란 지적이다. 영업이익 등 질적인 부분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 3분기 누계로 녹십자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5445억 원, 770억 원이다. 일동제약은 각각 2508억 원, 44억 원 정도다. 영업이익률로 비교하면 녹십자가 14.14%인데 반해 일동제약은 1.75%에 불과하다.
지난해 3분기까지 일동제약이 거둔 실적은 매출액 2502억 원, 영업이익 304억 원이며 영업이익률은 12.15%다. 불과 1년 새 수익성이 급격히 나빠진 셈이다. 올해 초 단행된 대대적 약가인하 조치의 영향으로 제너릭 제약사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다.
결국 녹십자가 제너릭 사업을 확대해 매출 뿐 아니라 수익구조까지 안정적으로 다변화하려면 일동제약과 같은 업체 몇 곳을 더 인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투자비와 효과 등을 고려했을 때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법이다.
◇ 적대적 M&A에 걸림돌 많아
만약 일동제약과의 결합이 충분한 시너지가 있고 녹십자에게 이를 추진할 의지가 있다고 해도 경영권 인수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수비용 부담과 명분 문제 등 걸림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녹십자와 일동제약 현 경영진의 지분율 차이는 11.84%다. 장내 거래나 공개매수 방식으로 주식을 끌어모아 해소하기엔 꽤 큰 격차다. 결국 적대적 M&A를 시도하려면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주주들로부터 주식을 넘겨받거나 연대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
일동제약엔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주주가 여럿 있다. 이호찬(12.57%), 피델리티(9.99%), 안희태(9.85%) 등이다. 이 중 안희태 씨와 이호찬 씨는 서로 연대해 일동제약 현 경영진과 대립하고 있는 주주들이다. 녹십자가 이들과 연계할 경우 예상외로 쉽게 일동제약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주주들과의 합종연횡으로 경영권을 손에 넣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언제든 경영권 분쟁이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녹십자가 이들의 지분을 인수해야만 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일동제약 주가는 녹십자의 지분 확대 소식이 전해진 후 단기간에 50% 이상 급등했다. 게다가 이들 3~5대 주주의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선 시가에 프리미엄까지 얹어줘야 할 가능성이 높다.
비용 뿐 아니라 '명분'과 '평판'도 문제다. 제약업계는 좁은 시장이라 오너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다. 녹십자의 고 허영섭 회장과 일동제약의 윤원영 회장도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회장의 아들인 허은철 부사장과 윤웅섭 부사장은 고교 동문 사이다. 따라서 적절한 명분 없이 녹십자가 적대적 M&A를 추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대외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을 수 있고, 업계의 '공적'이나 경계대상이 될 수 있다. 소탐대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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