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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얩 섬의 돌화폐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2-09-15 09:00:47

이 기사는 2022년 09월 15일 09: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큰 공적은 금융분쟁은 폭력이 아닌 재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니얼 퍼거슨). 즉 법치주의는 금융이 발달하는 데 절대적인 선결 조건이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금융분쟁은 법정에서 종결된다. 금융분쟁이 사법부가 중심이 된 제도권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사회는 폭력의 사회일 뿐이고 인권의 침해가 빈발할 것이다. 아직도 사금융 시장에서 종종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폭력은 반드시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행사하는 것만도 아니다. 채무자가 독촉하는 채권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국제금융법의 대가인 영국의 우드 변호사는 금융은 낭만적이라고 했다. 돈이 오가는 거래가 낭만적일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금융거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금융자산이란 동산, 부동산과는 달리 최소한 두 사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금융자산을 창조한다. 모든 금융상품은 아무리 복잡해도 채권과 채무의 조합이다. 금융관계는 금융자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두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에 금융자산에는 정치와 부의 분배, 이해상충이 내재되어 있다.

또 금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완충지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감정을 분출시킬 대체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금융관계가 헝클어지면 바로 인간관계가 타격을 받는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을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간섭을 하는데 이는 채무자의 인격과 행동에 대한 제약으로 나타나고 결국에는 반발과 불편한 감정을 유발시키게 된다. 어떤 두 사람이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는 순간, 그 전의 인간관계는 종료되고 결코 편할 수 없는 관계가 새로 형성된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정치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채무자는 약자이지만 세상에는 채권자보다는 채무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채권자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한다. 통상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무관하게 채권자를 싫어하고 채무자를 동정한다. 채무자의 불행은 채권자의 불행이지만 채권자가 사망하거나 파산하면 채무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금융산업의 기초가 되는 화폐와 신용 자체는 추상적 개념이다. 밀턴 프리드먼의 마지막 저서에 나오는 재미있는 설명을 빌려보자. 인구가 약 5000∼6000 명이었고 독일 식민지였던 서태평양 캐롤라인군도의 섬 얩(Yap) 이야기다. 필리핀에 가깝다. 이 섬 주민들은 도넛처럼 가운데 구멍이 난 돌을 화폐로 사용했다. 직경이 4미터인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이 돌화폐는 주민들 간의 거래에 사용되었는데 주민들은 화폐를 옮기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것이라는 표시도 하지 않는다. 누구 것인지 다들 알기 때문이다. 섬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은 몇 세대 전 섬 앞바다에 가라앉은 가장 큰 돌화폐의 소유자다. 아무도 본 적도 없고 건질 수도 없지만 그 돌의 구매력은 섬에서 여전히 인정된다. 독일이 1898년에 섬에 길을 내라고 주민들에게 명령했는데 길 없이도 잘 살아오던 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독일 정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대로 돌화폐에 벌금 표시를 한다. 그러자 주민들은 대경실색해서 길을 닦았다. 벌금표시는 지워지고 벌금을 면제받은 주민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있었던 이 일은 오늘날 발달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하에 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지폐는 정부가 정부에게 진 빚을 그 지폐로 갚는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하는 종이다. 정부에게 지는 빚 중에 가장 큰 것이 세금이므로 우리는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를 세금을 내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와 아무 관련 없는 모든 거래에 이 지폐가 사용되는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금융거래는 관념적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용에 의거한다. 금융산업 전체가 일종의 사상누각이다. 실체가 없고 약속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은행에 거액의 예금을 두고 노후 걱정 없이 안심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은 그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서류상의 숫자를 믿는 것이다. 얩 섬의 주민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금융산업 만큼 사회의 신용상태에 좌우되는 산업이 없고 법과 제도에 기초하는 것이 없다. 은행에 있는 내 명의의 숫자에 대해 판사와 경찰이 모르겠다고 하는 순간 그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외국 돈을 소지하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이유도 비슷하다. 법치주의가 확립되어 있고 법률의 집행이 잘 이루어지는 나라가 금융, 따라서 경제 선진국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외국에 나가서 그 나라 금융기관의 외국어로 된 장부기재를 믿고 안심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나라의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앞서야 한다.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나 사람에 대한 신뢰는 의사소통이 전제된다. 한국의 금융이 국제화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사회 전체의 국제화 미진에서 발생하는 소통 의지와 능력 부족,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정보전달과 신뢰의 미흡이다. 한국과 한국사람은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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