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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bell desk]허가 받은 사기꾼

조영갑 벤처중기2부 차장공개 2024-05-13 14:12:08

이 기사는 2024년 05월 09일 07:1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아니, 그게 허가 받은 사기꾼이 아니고 뭐겠어요?"

최근 한 프라이빗에쿼티(PE)의 심사역 임원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가 그의 말이 격해지는 구간이 있었다. 담담한 어투로 투자 포트폴리오 회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그는 최근 일부 벤처캐피탈(VC), PE 등이 보이고 있는 '염량세태'를 두고 목청을 돋웠다. 그의 말을 더 옮기자면 이렇다.

"자산운용사는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많은 VC나 PE의 투자금 상당 부분은 결국은 모태펀드, 연기금, 금융기관 등 공공 재원에서 나오는 거예요. 공공 재원은 돈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투자의 영역으로 넘어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평가 받아서 IPO(기업공개)에 성공하고 공모가 2배로 튀겨서 바로 엑시트하면 본인은 행복하겠죠. 그런데 회사는요? 그게 허가 받은 사기꾼 아닙니까?"

참고로 이 임원은 현재 사모펀드에 몸 담고 있지만 산업은행에서 오랫동안 투자금융을 담당한 이력이 있다. 젊은 시절을 산은에 바치고 마흔 넘어 PE에 투신했다. 산은 안의 VC 심사역이었던 셈인데 공공재원을 토대로 유망 기업의 젖줄을 대고 성장 과정을 함께 했기 때문에 뼛속까지 '공공성'을 탑재한 인물이다. 선비형 심사역이랄까.

그런 그의 눈에는 최근 FI들이 보이고 있는 투자-회수 패턴이 못마땅해 보였다. 기평 트랙으로 증시에 입성한 기업의 경우 그 회사의 '업사이드'가 시장에 어필했다는 이야기인데, 그 업사이드가 올라오기 전에 손을 털고 엑시트하는 건 일종의 사기적 투자에 가깝다는 논지다.

특히 상장 직후 공모가 수 배 구간에서 대량 매도를 통해 투자이익을 챙기는 건 '허가 받은 사기꾼'의 행태라는 거다. 실제 이런 기평 기업 중 FI의 '셀온'으로 주가가 폭락한 뒤 장기간 전전긍긍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될성부른 기업이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혼자 걸으라며 등을 떠미는 행위라는 얘기다.

물론 FI의 존립 근거는 투자수익이다. 펀드 운용자의 지위에서 손해를 내는 것은 배임 행위다. 본인의 밥줄도 끊긴다. 이런 관점에서 회수의 시기가 언제가 됐든 '멀티플'을 높이는 것은 FI의 미덕이다. 이 임원의 전제는 공공 재원의 운용이다. 공공의 돈이 섞이면 투자-회수의 행위에 멀티플을 뛰어넘는 과정과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실제 이 PE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이해가 간다. 그 역시 연기금 재원을 운용하고 있다. 뿌리산업에서 성장할 수 있는 제조사를 선택하고 10년 이상 투자금을 대줬다. 누적 투자액만 3000억원 넘는다. 히든 챔피언을 발굴해 CAPEX 물길을 확실하게 대주는 전략이다. 조합 해산의 일정에 따라 안분해 투자금을 회수, 회사와 시장에 부담을 최소화했다. 지금도 최대주주와 정기적으로 미팅하면서 성장 전략을 논의하고 있다. 알루미늄 합금으로 다종의 제품을 만드는 이 회사는 2014년 매출액 455억원에서 올해 1조원을 바라보는 회사가 됐다.

다른 반도체 장비 포트폴리오 역시 유사하다. 2022년 상장한 이 회사에 투자하면서 자발적으로 2년 6개월 락업을 걸었다. 진행하고 있던 전략장비 프로젝트가 완결될 때까지 풋옵션이나 엑시트를 감행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시총 8000억원에서 3조원 짜리 회사가 됐다.

이런 호흡의 투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 고유의 AUM과 조합 스케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임원이 알려주는 원칙은 간명하다. '투자=회사의 성장'이다. 돈은 기다려 줄 수 있다. 다만 사람이 기다리지 못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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