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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 공개 2008-12-09 10:55:47

[편집자주]

자본시장 발전에 신용평가는 인프라와 같은 존재입니다. 서브프라임사태로 신용평가의 공정성이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것도 신용평가의 중요성을 재차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더벨은 신용평가를 포함해 크레딧시장의 전반을 전문가의 날카로운 시각을 통해 분석합니다. 신용이슈 등 일련의 현상에 대해 폭넓은 이해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2008년 12월 09일 10시55분 thebell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 진실은 항상 승리하는가?

명의 편작의 고사를 생각해 보자. 편작은 뛰어난 의술로 깊은 병을 치료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훨씬 뛰어난 의술로 질병을 원천 봉쇄했던 두 형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요 임금의 선정은 백성들이 아예 정치의 존재를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아마도 존재가 잊혀진 정치세력은 의미 있는 역사를 만들기도 전에 몰락해버릴 것이다. 절차적 민주질서로 짜여진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신용위기가 닥치면 의례 신용평가사가 도마 위에 오른다. 온갖 질책이 쏟아지고, ‘신용평가 무용론’과 ‘신용위기 주범론’이 등장하며, 규제강화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된다. 평가사가 100% 완벽하게 리스크를 관리하면 신용위기가 없어질까? 물론 그럴 수도 없지만, 만일 그랬다면 시장에서 크레딧 투자는 사라지고, 누구도 신용평가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신용평가라는 비즈니스가 먼저 없어진다.

신용평가 비즈니스를 위해 적당히 위기가 필요하다거나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신용평가를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플레이어도 완벽하지 않다. 그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내는 플레이어가 있을 뿐이다. 완벽에 대한 지향은 필요하지만 결벽증적인 접근은 오히려 해롭다. 신용평가를 비난하기 전에 한 번쯤은 그 사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신용평가를 비난하기 전에

신용등급을 떨어뜨리면 평가사의 전화기에 불이 난다. 그 가운데는 원색적인 비난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해당 채권 보유자들의 항의 전화다. 물론 멀쩡한 기업의 신용등급을 무리하게 떨어뜨렸다는 비난은 드물다. 대부분의 비난은 문제가 있었다면 왜 진작에 낮추지않고, 하필 지금 떨어뜨렸느냐는 것이다. 평가사가 침묵하길래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투자했고, 그 후에 별반 펀더멘털이 달라진 것도 없는데 신용등급이 떨어져서 피해를 입었다는 항변이다.

등급하락으로 인한 투자자의 손실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투자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투자 판단에 무리가 없었는지 살펴서 후일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 신용등급과 기업 펀더멘털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나아가 기회로 만드는 것이 신용분석이다. 신용투자에서 신용분석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신용분석에 대한 접근은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채권시가평가 시행 이후 여러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에 크레딧 애널리스트가 등장했고, 카드위기를 겪으면서 저변이 크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2005년 4분기 이후 은행의 사모사채 인수 확대로 회사채 시장이 위축되면서 신용분석 역량의 진화도 멈춰버렸다. 개별 애널리스트들의 숙련도는 향상되었지만, 양적인 확대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운용업무로 영역을 옮겼다. 신용분석만으로는 더 이상 조직에 기여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의 궁벽함은 자연스럽게 신용평가에 대한 관심 약화로 이어졌다.

◇ 건설PF의 아픈 추억

건설PF에 대한 우려가 아직 크지 않던 2005년 9월 한 평가사는 세미나를 열어 PF지급보증에 대한 시각을 전했다. 사실상 PF우발채무를 차입금으로 보겠다는 입장이었다.

“우발채무는 시공사의 차입금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보증수혜자의 차입금 상환능력이 의문시될 경우에는 차입금에 반영하겠다. 현실적으로 시행사의 대부분이 명목상의 회사로 신인도가 낮아 위험 분산 효과가 제한적이다.”

구체적으로는 지급보증을 전부 차입금으로 간주하는 ‘총규모 접근’과 사업지연 가능성 및 실제 분양률을 반영하는 ‘개별 현장별 접근’의 병행 사용을 제시했다. 특히 총규모 접근에서는 차입금과 지급보증 합계액이 자기자본의 300% 이내이어야 한다는 구체적 기준까지 내놓았다. 지금 보아도 상당히 합리적 기준이다.

하지만 이 원론은 단지 내부 검토에만 쓰일 뿐, 대외적인 평가기준으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평가사 사이의 미묘한 시각차, 현실적 이해가 걸린 건설사와 IB의 전략적 선택, 투자자들의 수수방관이 종합된 결과다. 시장의 외면 속에 선구적 평가기준은 바닷가 모래 위에 새긴 맹세처럼 포말 속으로 그렇게 쓸려가 버렸다.

당시 누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평가사의 보수성은 사안에 따라 상대적이다. 또 보다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그 입장을 고수하지 못하는데 뭐가 다르다고 하겠는가?

시장의 태도가 관건이다. 신용평가가 앞서가더라도 시장이 함께 하지 않으면 글자 그대로 도루묵이 된다. 평가사의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은 시장의 담론 형성 능력이다. 틈이 벌어진 항아리로는 보배를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안타까움이 앞서지만 지금 우리 회사채 시장에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 가야 할 길이 한참 멀다. 그래서 한탄이 앞선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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