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전체기사

50대 모범생의 도전, 그리고 스크린골프 신화 김영찬 골프존 대표이사

박상희 기자공개 2011-07-29 15:26:07

이 기사는 2011년 07월 29일 15:2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50대 중년과 벤처 창업은 낯선 조합이었고, 골프와 IT기술이 결합한 스크린골프는 생경했다. 하지만 창업 5년 만에 국내에 스크린골프 문화를 정착시켰고, 10년이 되던 지난해에는 2000억원에 가까운 매출액을 달성했다.

벤처 신화 속 주인공은 어릴 적 부모님 말 잘 듣는 착한 소년이었고, 청소년 시절엔 일탈 한 번 해 본 적 없는 모범생이었다. 졸업 후에는 대기업에서 평범한 월급쟁이로 십수년을 보냈다.

굴곡 없는 평탄한 오십 줄 인생을 살아온 그가 벤처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일탈이라면 일탈이었고, 도전이라면 도전이었다. 남들은 은퇴를 고려할 시기, 무모한할 수도 있었던 도전은 신화를 만들었고, 그를 수천억원대 벤처 갑부 반열에 올려놓았다. 바로 골프존의 김영찬 대표이사(65. 사진)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수학 선생님. 그러나 진학 과정에서 사범대가 아닌 공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자연스럽게 엔지니어 업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 1977년 GM코리아 공채 1기 100명 중 한 명으로 입사해 브레이크 시스템 담당 연구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브레이크는 차체 중에서 인명과 직결된 부분인 만큼 가장 중요한 파트였지만 그는 일이 따분했다. 일부 국산화를 담당하긴 했지만 당시 국내 기술력이 많이 뒤처졌기 때문에 설계 제안 등 엔지니어가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넓지 않았다.

3년 남짓 GM코리아에 몸담은 그는 79년 삼성전자 시스템사업부로 옮겼다. 그곳에서 15년 정도 일했더니 어느덧 정년이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봉급생활자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인 사장직까지 오르기는 힘들 것 같아서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난생 처음 개인 사업에 나선다.

사업 아이템은 부가가치통신망(VAN). 지금처럼 위성방송과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700서비스를 통해 한 밤 중에 코리안특급 박찬호 선수의 경기 결과를 접했다. 주식 시세나 대학 수능 입시 정보도 ARS서비스를 통해서 얻던 시절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3년 정도는 하루 밤새 천만원대 수입을 올릴 정도로 성과가 좋았다. 하지만 블루오션이었던 정보 제공 서비스 시장은 음란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쪽으로 변질됐고, 그는 미련 없이 사업을 접었다.

◇ 노후대비용 골프존, 대박을 터뜨리다

2000년 5월8일 '골프존'이라는 사명으로 두 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 쉰 다섯. 순전히 노후 대비용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가장 자신있는 분야와 트렌드를 결합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 뭐가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뉴 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사람들은 IT와 인터넷에 익숙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한다고 자부했던 골프. 그 둘이 만나 탄생한게 골프시뮬레이터 업체, 골프존이었다.

당시 실내 골프연습장은 전국적으로 3000곳에 달했다. 각 연습장에 골프시뮬레이터를 2대씩만 팔아도 6000대 시장이었다. 1년에 500대씩 판다고 치면 10년은 족히 갈 수 있는 사업이었다. 당시 시뮬레이터 한 대 가격이 2000만원대였으니, 1년에 500개 판매를 목표로 한달에 40개 전후로만 영업 활동을 펼쳐도 노후 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는 쉽지 않았다. 머리 속에 있던 골프시뮬레이터를 실제 기계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됐다. 실제로 골프시뮬레이터가 출시된 것은 1년 반이 지난 2002년 1월. 연구 개발비로만 5억원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이 서니 투자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출시 첫 해에 올린 매출액은 20억원. 이후 매출이 30억원, 50억원, 120억원으로 점프하더니 2008년에는 모든 벤처기업의 꿈의 수치인 1000억원을 달성했다. 골프존은 더 이상 노후 대비용 개인적인 사업이 아니었다. 한국의 스크린골프 문화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골프존의 장기 비전에 대해 고려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GM코리아, 삼성전자 등 대표적인 제조업체에서 수 십년 간 몸담아 온 김 대표는 그 생태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원가'와 경쟁해야 하는 제조업체로 머물러 있다가는 대기업에게 먹히고 만다는 판단이 섰다. 자본력과 기술력에서 뒤처지는 중소 벤처기업은 기술 등 하드웨어보다는 콘텐츠 같은 소프트웨어로 무장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원점으로 돌아가보니 골프 시뮬레이터를 탄생시킨 것도 결국은 상상력과 아이디어였다.

기업공개(IPO) 역시 골프존의 비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생은 벤처였지만 문화콘텐츠 기업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시장의 인증이 필요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에 안주하면 도태할 것이 분명했다. 끊임 없는 연구개발과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자금도 필요했다.

하지만 비교적 순탄했던 그의 인생 여정과는 달리 골프존의 상장 행보는 평탄치 못했다. 거래소 예심통과 과정에서 업종 이슈로 속을 끓였고, 공모가도 3차례나 하향조정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큰 위기나 고비는 없었지만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르게 귀결된다(사필귀정)'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7전8기 끝에 상장한 골프존은 시장으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환영을 받았다. 상장 후 주가는 공모가 대비 하락했지만 크게 괘념치 않는다. 골프존의 미래와 비전을 믿기 때문이다. 골프존은 올해 직영점을 추가로 열고 수요자와 소비자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예정이다. 또 중국과 캐나다 등 해외 진출도 가속화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골프존의 지향점은 "골프에 관한 모든 것은 골프존으로 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콘텐츠를 개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확대하겠다는 것. 요즘 IT업계의 화두인 클라우딩과 골프의 접점을 찾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대한골프협회와 함께 추진 중인 국내 1호 골프코스 복원 작업도 문화콘텐츠 사업을 강화하겠다는 다짐의 일환이다. 지금의 어린이 대공원 자리에 있었던 국내 1호 골프장인 군자리 골프 코스를 3D그래픽으로 재현하는 작업이다. 이와 함께 골프 박물관 개장도 추진 중이다.

◇ "원일 대표는 아들이기에 앞서 사업 파트너"

그의 아들, 김원일 공동대표에 대해서는 세간에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원일 대표는 회사 내부 경영을 맡고, 아버지인 김 대표가 대외업무를 맡고 있다. 아들에 대한 질문을 하자, 대견함과 미안함이 표정과 말투에 동시에 묻어났다.

원일 대표는 지난 2000년 아버지와 함께 골프존의 공동 창업자로(co-founder)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6세. 8년 후인 30대 중반에 골프존 부사장 및 최고전략책임자(CSO) 자리에 오른 데 이어 지난해에는 공동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사람들은 아버지 덕분에 젊은 나이에 부와 영예를 모두 안게 됐다며 부러움과 시기 어린 질투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반면 아버지인 김 대표가 보기에는 어린 나이에 벤처사업에 뛰어들어 고생한 아들이 미안하고 고맙고, 대견할 뿐이다. 결과적으로야 사업이 번창했지만, 초기에는 아무도 성공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던 그야말로 벤처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골프존을 창업할 당시 원일 대표는 해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원하는 공부를 더 하지 못하고 사업에 뛰어들게 한 것이 그저 미안하다.

김 대표는 단 한번도 원일 대표에 대해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꼬박 꼬박 '김 대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사업에 있어서는 아들이기에 앞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그는 본인보다 아들이 더 꼼꼼할뿐더러 자신이 내놓는 사업 아이디어에 대해 냉정하게 거절도 잘하는 편이라고 했다. 아이디어의 사업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그로 인한 시간과 비용 대비 얼마만큼의 투자 수익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확고하다는 것. 원일 대표는 3년 전부터 사업과 관련된 결재 일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만큼 신뢰가 두텁다는 방증이다.

그는 본가가 있는 대전에서 서울 사무실로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출근한다. 대전에서 출근길에 올라 저녁때 대전 본가로 귀가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만도 하건만 서울에 집을 마련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전원생활을 꿈꿔 온 아내에 대한 배려였다. 그는 19살 때 등산을 갔다가 아내를 처음 만나 10년 연예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는 성공한 벤처사업가이자 애처가였고, 인자한 아버지였다. 그의 성공 비결은 그를 믿고 지지해준 가족의 힘, 그리고 골프에 대한 무한 애정 그 어딘가에 있는 듯 했다.

img4.gif

img5.gif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주)더벨 주소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영풍빌딩 5층, 6층대표/발행인성화용 편집인이진우 등록번호서울아00483
등록년월일2007.12.27 / 제호 : 더벨(thebell) 발행년월일2007.12.30청소년보호관리책임자김용관
문의TEL : 02-724-4100 / FAX : 02-724-4109서비스 문의 및 PC 초기화TEL : 02-724-4102기술 및 장애문의TEL : 02-724-4159

더벨의 모든 기사(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copyright ⓒ thebell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