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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 회사채 수요예측]"퇴직연금 가입할테니 금리 낮춰"...이슈어의 자발적 '꺾기'⑤발행사가 주관사에 요구..."원활한 영업 위한 관행"

강철 기자공개 2023-03-13 08:01:03

[편집자주]

가격 결정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2012년부터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가 시행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몇몇 발행사와 주관사의 편법 행위가 시장의 질서를 심각하게 교란하고 있다. 더벨이 수요예측 제도의 허점, 그리고 개선방안을 살펴본다.

이 기사는 2023년 03월 09일 10:1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발행사와 투자자가 여러 금융상품을 매개로 모종의 거래를 하는 이른바 '꺾기'는 수요예측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폐단 가운데 하나다. 퇴직연금을 비롯한 여러 금융상품 영업을 명분으로 내세운 발행사와 투자자의 무분별한 꺾기는 회사채 가격 결정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크게 저해한다.

하지만 발행사와 투자자가 구속력 있는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 이상 꺾기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서 꺾기를 폐단이 아닌 원활한 영업을 위한 관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퇴직연금 반대급부 '저금리 입찰'

지난달 공모 회사채 발행에 나선 한 기업은 주거래 관계에 있는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에 수요예측에 반드시 참여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아울러 가급적 가산금리 밴드 하단보다 낮은 구간에서 응찰하기를 요청했다.

이 발행사는 수요예측 참여와 저금리 입찰의 대가로 퇴직연금을 내세웠다. 해당 금융사와 대규모 퇴직연금 상품 거래를 하고 있으니 가입자가 발행하는 회사채를 낮은 금리에 매입하는 식으로 일종의 반대급부를 제공해달라는 논리를 펼쳤다.

발행사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한 금융사는 수요예측에 참여해 밴드 하단보다 낮은 구간에서부터 주문을 넣었다. 발행사는 이들의 저금리 공세 덕분에 트랜치 모두 개별 민평보다 낮은 가산금리를 확정하는 등 역대급 강세 입찰에 성공했다.

국내 대기업집단 계열의 한 발행사도 올해 초 퇴직연금 가입을 앞세워 거래 관계에 있는 증권사에 저금리 응찰을 요구했다. 몇십억원이라도 좋으니 수요예측에 들어와 발행금리 하락에 일조하는 한편 전체 입찰 경쟁률을 높이는데 기여해달라고 부탁했다.

해당 증권사는 발행사와의 이해 관계를 고려해 저금리 응찰을 고민했다. 그러나 적잖은 평가손실을 유발할 수 있는 정상적이지 않은 투자라는 점이 내부 컴플라이언스 시스템에 의해 걸러졌고 결국 수요예측 참여는 이뤄지지 않았다. 담당자는 이번 불참으로 발행사와의 관계가 틀어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최근 투자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AA등급 회사채 발행사를 중심으로 금융사에 수요예측 참여를 요청하는 사례가 부쩍 잦아지고 있는 것 같다"며 "회사채 금리가 기본 4~5%로 원체 높게 형성되고 있다 보니 발행사가 조금이라도 금융비용을 줄이기 위해 퇴직연금을 앞세운 영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발행사가 요청을 하는 대상이 그나마 은행, 보험사, 증권사여서 가격 결정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며 "연기금과 같은 큰손이 발행사의 부탁에 맞춰 투자를 했다면 프라이싱 과정에 미치는 영향과 파장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 채권 순매수 규모와 비중 <출처 : 나이스신용평가>

◇꺾기 관행 없애기 쉽지 않아

발행사와 투자자가 퇴직연금을 비롯한 여러 금융상품을 매개로 리베이트 거래를 하는 이른바 '꺾기'는 국내 회사채 시장의 대표적인 폐단 가운데 하나다.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논리에 따라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깜깜이 입찰은 가격 공정성 제고를 위해 만들어진 수요예측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을 기울였다. 수시로 불완전판매 검사를 실시해 관련 행위를 적발했고 정도가 심한 금융사에는 과태료를 부과했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꺾기의 정의와 구체적인 처벌 근거를 담은 퇴직연금 감독 규정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꺾기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있다. 발행사와 투자자가 애초에 원활한 영업을 명분으로 내세운 카르텔로 엮여 있기 때문에 적발이 쉽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꺾기가 규제의 허점을 이용해 암암리에 이뤄지는 탓에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퇴직연금업계 관계자는 "정황 증거를 포착했다고 해도 거래 당사자가 이해관계가 없는 투자였다고 주장한다면 섣불리 꺾기라 단정하기 어렵다"며 "발행사와 투자자가 애초에 꺾기를 의심받을 만한 문서상의 증거를 남기지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선 이러한 영업 카르텔이 없어지지 않는 한 꺾기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발행사와 투자자가 강한 구속력 있는 내부 통제 시스템을 운영하지 않는 이상 원활한 영업을 명분으로 내세운 거래를 막는 것이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관련해서 꺾기를 폐단이 아닌 어쩔 수 없는 관행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적잖은 수익을 안겨준 고객의 회사채를 매입하는 것을 '상도의'가 아닌 가격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로 몰아간다면 어느 누가 영업을 할 수 있겠냐는 주장도 나온다.

시장 관계자는 "꺾기를 폐단으로 규정한다면 은행이 고객에게 대출을 해주는 조건으로 예·적금 상품과 카드를 가입시키는 것부터 금지시켜야 한다"며 "같은 선상에서 회사채 주관사의 계열사가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캡티브 영업도 정당하지 않은 행위"라고 말했다.

이어 "꺾기가 회사채 가격 결정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일부 흐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수요예측 제도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심각한 악영향을 유발하지는 않는다"라며 "금리가 다시 2~3% 수준으로 내려간다면 발행사의 저금리 입찰 요청도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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