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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 회사채 수요예측]'주관사→투자자' 돌변후 금리베팅..."가격공정성 해친다"③조율자가 본사 '리테일·운용' PI 자금 동원해 금리 왜곡…'차이니즈월'에도 저촉

강철 기자공개 2023-03-06 13:34:10

[편집자주]

가격 결정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2012년부터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가 시행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몇몇 발행사와 주관사의 편법 행위가 시장의 질서를 심각하게 교란하고 있다. 더벨이 수요예측 제도의 허점, 그리고 개선방안을 살펴본다.

이 기사는 2023년 03월 03일 13:1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공모 회사채 주관사가 조직 내 리테일 부서를 동원해 해당 발행사의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영업 실적을 명분으로 앞세운 이들 주관사의 무분별한 초저금리 입찰 공세가 회사채 가격 결정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크게 해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발행사가 수요예측 참여와 저금리 입찰을 주관사 선정의 필수 조건으로 제시하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주관사의 시장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금융당국이 보다 강제성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주관사가 투자자로 돌변

LG전자는 지난 2월 27일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100회차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역대급 강세 입찰에 성공했다. 발행액을 모집액의 2배인 7000억원으로 늘렸음에도 매우 만족스러운 프라이싱 결과가 나왔다.

앞서 회사채 수요예측을 실시한 SK E&S,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포스코케미칼, 한화토탈에너지스, 롯데칠성음료, CJ ENM 등도 이러한 대표 주관사단의 적극적인 저금리 입찰에 힘입어 역대급 강세 발행에 성공했다.

이들 역시 주로 3년 이하 단기물에서 주관사단 리테일·운용 부서의 확실한 지원 사격을 받았다. 강세 입찰은 수요예측 참여자의 상당수가 밴드 하단보다 훨씬 낮은 구간에서부터 매입 의사를 밝혔기에 가능했다.

초저금리 입찰은 대표 주관사단이 주도했다. 한국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을 위시한 몇몇 대표 주관사는 조직 내 리테일, 운용, 영업, FICC 파트를 통해 대거 수요예측에 참여해 밴드 하단보다 낮은 구간에서부터 100억~200억원의 주문을 넣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개별 주관사별로 다른 부서를 동원해서 총액인수에 해당하지 않는 트랜치에 초저금리 주문 공세를 펼쳤고 이를 통해 손쉽게 회사채를 매입했다"며 "특히 1조원이 넘게 들어온 3년물에서 주관사단의 활약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롯데지주, 롯데쇼핑, 롯데하이마트 등 개별 민평보다 낮은 가산금리를 확정하지 못한 발행사도 주관사단으로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만약 주관사단의 저금리 입찰이 없었다면 확정금리는 지금보다 최소 20~30bp가량 높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시장 관계자는 "개별 주관사가 인수단으로 들어가지 않는 트랜치에 자사 리테일, 운용을 동원해 저금리 주문 공세를 펼치는 행태가 작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부쩍 심해졌다"며 "시장 침체로 회사채 주관 실적을 쌓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몇몇 증권사가 영업 활성화를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현대건설 306회차 2년물 회사채 수요예측 참여 분포. 기관투자자 1~5가 대부분 주관사단 산하의 리테일 파트
◇주관사 개입 차단을 위한 제도 필요

업계에선 주관사단의 이러한 행태가 회사채 가격 결정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해친다고 지적한다. 주관사라는 명분을 앞세워 해당 발행사의 펀더멘탈과 금리에 개의치 않고 무분별하게 저금리를 써내는 것이 수요예측의 본래 취지에 과연 부합하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주관사단의 인위적인 시장 개입 덕분에 발행사가 최소 20~30bp의 금리 이득을 얻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회사채 발행액과 규모가 객관적으로 정해지도록 중간에서 조율을 해야 하는 주관사가 정작 가격 결정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해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행태는 명백하게 시장을 왜곡함과 동시에 금융사의 내부 부서간 정보 교류를 차단하는 제도인 차이니즈월(Chinese Wall)에도 저촉된다"며 "리테일 파트가 시장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회사채를 매입하는 것이 수익성 관점에서 해당 주관사에 상당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점도 상당히 우려스럽다"고 설명했다.

주관사의 무분별한 시장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금융당국 차원에서 지금보다 구속력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관련해서 주관사의 컴플라이언스 조직이 영업 부서에 보다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시장 왜곡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각에선 주관사의 시장 개입이 발행사의 암묵적인 영업 카드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금의 행태가 고쳐지지 않으면 발행사가 주관사를 선정하는 조건으로 수요예측 참여와 저금리 입찰을 의무화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회사채 투자자는 "2021년에 자본시장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차이니즈월을 개별 금융사가 자율적으로 해석하고 운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며 "주관사단의 수요예측 참여는 이처럼 느슨해진 차이니즈월의 허점에서 파생된 일종의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논란이 구속력 있는 제도에 의해 해결되기 전까지는 그레이존(gray zone)에 있을 공산이 크고 따라서 당분간은 시장 왜곡이 지속된다고 봐야 한다"며 "개별 주관사가 자체 자정 노력을 통해 이행충돌의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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