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2년 02월 21일 08:5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우리나라 기업(금융회사 제외, 공기업 포함)이 주식을 순발행해 조달하는 돈은 일년에 대략 30조 원대다. 주가가 잘 오르면 늘기도 하고 주가가 떨어지면 줄기도 하지만 크게 변하지 않는다. 최근 10년간 그 수준이니 정체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채권에 대해서는 얼마라고 정해 말하기 어렵다. 경제 상황에 따라, 자금수요에 따라 들쭉날쭉 한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최근에 상전벽해를 겪었다. 고작 몇 조 원에서 많아야 20조~30조 원이던 수준이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60조~70조 원 시장으로 커졌다. 순발행이 아니라 총 발행액으로 따지면 채권이 주식보다 약 3배쯤 더 많아졌으니 애벌레가 번데기를 벗고 성충이 됐다고 할까
이론의 여지 없이 우리나라 자본시장은 주식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경제발전 초기, 맨 주먹으로 일으킨 우리 기업들은, 투자와 성장을 위해 자본의 축적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기업들이 쉽게 주식을 발행해 돈을 끌어모을 시장이 필요했고, 투자자들을 그 시장으로 끌고 올 당근이 필요했다. 증권사들은 기업과 투자자 사이에서 주식거래를 돕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였을 것이다.
반면 기업의 부채 조달은 주로 은행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은행이 예금과 채권을 발행해 기업에 단기로 대출을 해 줬고 정부가 뒤를 봐 줬다. 채권시장의 역할이나 존재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랬던 채권시장을 2008년 금융위기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한 순간에 성장시켰다.
자본시장의 모든 시스템이 수십년간 '주식'에 맞춰져 왔음은 물론이다. 정부의 자본시장 제도는 대체로 주식시장 제도와 동의어다. 기업의 공시 정보는 주식투자자를 위한 것이고 채권 투자자에게 필요한 웬만한 정보는 공시 의무가 완화돼 왔다. 기업의 IR팀은 주가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당연히 투자자설명회는 주식을 운용하는 기관투자가가 초청 대상이다.
증권사 조직도 마찬가지다. 가장 안정적인 수익은 주식 브로커리지에서 나온다. 고객들이 주식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사고 파느냐에 따라 수익이 결정된다. 증권사 직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고객의 거래를 끊임없이 유발하는 일이 된다. 주요 핵심 보직의 담당자는 '주식쟁이'가 맡는 것이 당연시된다. 리서치센터에서는 어떤 주식을, 얼마에 사고 팔지를 알려주는 리포트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쏟아진다.
'채권쟁이'에게는 참으로 척박한 토양이다. 주식과 채권은 DNA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주는 '얼마를 버는 지'가 중요하다. 채권자는 '떼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주주는 주가가 올라야(매매를 해야) 돈을 벌지만 채권자는 시간이 가면(보유만 해도) 돈을 번다.
기업은 최소한 한 번 이상 주식을 발행한다. 그러나 주식 발행은 기업의 생애에서 아주 이례적인 몇 번의 이벤트다. 거꾸로 채권은 모든 기업이 발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들에게는 일년에도 몇 번씩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자금조달의 수단이다. 증권사에게 기업은 주식으로 보면 뜨내기 손님이요, 채권으로 보면 단골손님인 셈이다.
바야흐로 채권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주식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기업들은 금융위기를 계기로 채권이 더 이상 옵션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을 알아챘다. 대대적인 회사채 발행은 그 같은 각성에서 시작됐다. 향후 십수년간 금융시장의 주역이 될 베이비붐 세대들은 더 이상 화끈한 '대박'을 꿈꾸지 않는다. 꼬박 꼬박 이자가 나오는 채권을 찾고 있다.
우리 자본시장에, 금융당국에, 증권사에 남겨진 숙제는 분명하다. 95% 이상 주식으로 채워진 DNA를 어떻게 50 대 50 으로 맞출 것이냐. 늦는 자에게 주어질 몫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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