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벌3세]'디자인경영' 리더십 검증…'대관식' 서막 열린다[정의선 현대차 부회장]겸손한 노력파, 세대교체·지배구조 정비 '스타트'
박창현 기자공개 2015-01-16 08:27:00
이 기사는 2015년 01월 13일 10:4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2015년 1월 2일 오전 8시 양재 사옥 대강당에서 열린 현대자동차그룹 시무식. 단상 위에는 임원들과 정몽구 회장을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정 회장이 등장하기 전 이미 대강당은 임직원들로 가득찼다.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사진)도 일찌감치 도착해 자리를 지켰다. 의자에 앉기 전 정 부회장은 행사에 참석한 임원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인사를 마친 정 부회장은 여느 임원들과 똑같은 의자에 앉았다. 평범한 옷차림과 진중한 자세, 몸에 베인 격식은 현대가(家) 자제의 전형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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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주영 회장의 장손인 정 부회장은 황태자 자리를 넘어 이제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다. 물밑 작업도 척척 진행 중이다. 정의선 시대가 멀지 않았다.
◇부끄럼 많던 학생, 밥상머리서 리더십을 배우다
학생 '정의선'의 삶은 지극히 평범했다. 지인들 사이에서 "재벌인 줄 꿈에도 몰랐다"는 짐짓 식상한 얘기가 자주 나온다.
1970년 생인 정 부회장은 경복초등학교와 구정중학교(현 압구정중학교)를 거쳐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대학교 MBA를 수료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정 부회장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의 학교 입학 때마다 여지없이 재계 거물 정주영 회장의 손자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하지만 그 손자가 누구인지 밝혀지기까지는 항상 수 개월이 걸렸다. 스스로 밝히지도 튀지도 않았다. 압구정중학교와 휘문고등학교에 워낙 특출난 집안의 자제가 많았기도 했지만 정 부회장 특유의 겸손함도 영향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실제 정 부회장의 한 지인은 그를 "내성적이고 특별히 튀는 구석이 없었던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을 알기에 지금의 경영자 '정의선'을 볼 때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한다.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실하고 남을 잘 배려하는 성격 탓에 그를 따르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상위 0.1% 재벌 친구들 외에도 편하게 만난 학교 친구들이 많았다. '7막 7장'의 저자이자 영화배우 남궁원 아들로 유명한 홍정욱 ㈜헤럴드 회장도 동네 친구 가운데 한명이다.
정 부회장의 경영 수업은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 이뤄졌다. 현대가는 밥상머리 교육으로 정평이 나있다. 밥상머리 교육은 특별한 자녀 교육법이 아니다. 아침식사 만큼은 가족이 함께 한다는 원칙이 곧 교육 이념이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청운동 자택에서 자녀들과 아침 식사를 매일 함께 했다. 새벽 5시가 아침 식사 시간이다. 이 철칙을 지키기 위해 자녀들과 며느리, 손주·손녀들도 아침형 인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근면과 성실은 현대가의 가풍이 됐다.
정 부회장은 할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과 아버지 정몽구 회장 등 2대에 걸쳐 밥상머리 교육을 받았다. 정몽구 회장은 선대 회장 못지 않게 가족의 결속력을 중시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자녀는 물론 사위들까지 불러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유교적인 법도가 몸에 벤 정 부회장에게 성실과 겸손은 생활 습관 그 자체였다. 고지식한 현대가 정신은 그의 리더십의 근간이 됐고, 적통 후계자 자격을 부여했다.
◇구매실장부터 그룹 부회장까지..'리더십'을 보이다
정 부회장은 노력파로 정평이 나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성격이지만 경영인으로서 추진력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부의 평가다.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밟아 나가면서 스스로 성과의 열매를 따본 것이 경영자 '정의선'을 만드는 원천이 됐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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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전문대학원을 마친 1997년, 정 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이 아닌 일본 종합상사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 취직한다. 2년 간 상사맨 생활을 한 후 그는 1999년 현대차그룹에 입사한다. 그가 맡은 첫 보직은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사)이었다.
공교롭게 정몽구 회장 역시 첫 경영 수업을 자재 부서에서 시작했다. 제조업 영업 비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재비다. 자재비 관리가 곧 제품 가격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경영자로서 비용 관리 역량을 키우는 것을 가장 먼저 주문한 것으로 판단된다.
2001년 현대차 영업지원사업부장(상무)과 2002년 국내영업본부 부본부장(전무), 2003년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 겸 기아차 기획실장(부실장)을 거쳐 2005년에는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다. 정 부회장은 기아차 수장을 맡게되면서 본인만의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2005년 당시 기아차는 매출 정체 조짐을 보였고, 영업이익 역시 전년 대비 8분의 1 수준인 740억 원까지 떨어졌다.
이듬해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정 부회장은 '디자인 경영'을 선언하고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디자인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이후 디자인 경영을 녹여낸 야심작 'K-시리즈'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기아차의 중흥기를 연다. 괄목할 만한 경영 성과를 거둔 그는 2009년 8월, 부회장 승진 훈장을 달고 다시 현대차로 돌아왔다.
◇황태자, 대관식을 준비하다..공정위 칼날을 피해서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후계 승계는 기정사실이다. 남은 것은 방법과 시기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에는 대관식 준비가 분주했던 한 해였다.
당장 지배구조 재편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일감 몰아주기 이슈를 해소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공정위는 지난 2012년 10월 대기업 계열사 간 부당한 내부 거래를 막기 위해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총수 일가 지분이 30% 이상(비상장사는 20% 이상)인 계열사 중 내부거래 규모가 200억 원 이상이고, 내부 매출 거래 비중이 12%가 넘는 곳이 규제 대상이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정의선 부회장 소유 자회사들이 대거 규제 대상에 포함돼 있었다. 먼저 일감몰아주기 대표 수혜기업으로 낙인 찍였던 광고 대행 계열사 '이노션' 보유 주식 40% 가운데 30%를 처분했다. 정 부회장은 지분 처분을 통해 공정위 규제 칼날을 피하는 동시에 승계 재원 3000억 원도 확보했다.
현대엠코와 현대엔지니어링 합병도 이뤄졌다.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엠코 지분 25.06%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정몽구 회장 지분까지 합치면 총수 일가 지분이 35.16%에 달하는데다 내부거래 비중도 61.19%로 높았다. 하지만 현대엠코가 현대엔지니어링과 합병되면서 총가 일가 지분율은 16.4%까지 낮아져 규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자동차 부품 계열사인 현대위아와 현대위스코, 현대메티아 합병도 정의선 부회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현대위스코는 대표적인 오너 소유의 일감 수혜 계열사다. 지난해 매출 6135억 원 가운데 66%에 해당하는 4050억 원을 계열사 거래를 통해 벌어들였다.
현대위스코 지분 57.87%를 보유하고 있던 정 부회장은 이번 3사 합병으로 지분율이 1.95%까지 희석됐다. 부품사 지배구조 재편으로 적통 후계자는 공정위 규제를 피하는 동시에 그룹 핵심 부품사 지분 확보를 통한 영향력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는 평가다.
이제 시장의 눈은 현대글로비스로 쏠리고 있다. 현대글로비스 최대 주주는 지분 31.88%를 보유한 정 부회장이다. 보유 지분이 곧 그룹 승계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만큼 아직 공정위 규제 대상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대글로비스의 행보에 촉각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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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부회장 중심의 세대 교체도 한참이다. 정몽구 회장을 보필하던 가신들이 물러나고 젊은 임원들이 세를 넓히는 모양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최한영 현대차 쌍용차담당 부회장과 설영흥 현대 중국 사업 총괄 부사장, 박승하 현대제철 부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근 1년 사이 정몽구 회장의 측근으로 불리던 최고위급 임원들이 줄줄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정 부회장 체제 구축을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관식 준비는 8부 능선을 넘었다. 다만 여전히 핵심 키인 현대글로비스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결정된 사안이 없다. 더욱이 현대글로비스는 삼성그룹의 삼성SDS,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 등과 마찬가지로 일감 몰아주기 원죄를 안고 있는 계열사다. 반기업 정서와 재벌 3세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어느 때보다 높게 요구되는 때임을 감안할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정의선 시대'의 조기 정착 여부를 판가름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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