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특수은행]'자산 재배치' 혼선…중후장대 산업과 잇단 갈등[산업은행①]대기업 익스포져 축소 필요...설비금융 대기업그룹과 마찰 불가피
윤동희 기자공개 2015-12-16 09:52:44
이 기사는 2015년 12월 14일 10:5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정부의 잦은 정체성 변화 요구로 혼선을 빚었던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즘 한국산업은행은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정체성 변화 요구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부실화를 계기로 국회·정부 등 각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기업 구조조정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거나 정책금융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진다. 국책은행으로서 국가 기간산업을 육성하고 금융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쩌다 산업은행이 이렇게 동네북 신세가 됐나, 기업 부실화를 방기한 무책임한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나"라는 내부 볼멘 소리도 들린다.산업은행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변화 요구는 기존 기간산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줄이고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산업의 지원을 늘리라는 외부 압력이다. 주력 지원 대상이었던 철강·조선·해운업을 '경기민감산업'으로 지정하고 여신 지원 재검토 대상에 올려야 하는 꽤 어려운 숙제다. 여신 포트폴리오 조정을 요구한 셈으로, 필히 해당 업종 및 그룹과 마찰이 뒤따른다.
산업은행은 1954년 우리나라의 산업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됐다. 반세기 넘게 설비금융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등 국책은행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환경은 바뀌었고 산업은행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산업은행법에서 규정하는 은행의 업무는 당초 '주요산업의 개발에 기여할 시설'과 관련한 금융지원 업무에서 △산업의 개발·육성 △중소기업의 육성 △사회기반시설의 확충 및 지역개발 △에너지 및 자원의 개발 △기업·산업의 해외진출 △기업구조조정 △정부가 업무위탁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분야 △그 밖에 신성장동력산업 육성과 지속가능한 성장 촉진 등 금융산업 및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자금의 공급이 필요한 분야 등으로 업무 범위가 확대됐다.
정부가 가장 최근 산업은행에 부여한 역할은 '중견기업 육성 기능을 강화하고 간접투자를 확대해 모험자본 형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10월 발표한 기업은행·산업은행 역할 강화안의 일부다.
금융위는 당시 "특히 산업은행은 전체 여신 중 경기민감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내은행 및 기업은행 보다 높은 수준"이라며 "최근 조선·해운 등 일부 산업의 경우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어 특정 산업에 대한 여신을 선제적으로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향후 주력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미래성장 동력 산업의 발굴·지원을 강화하라고 강조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중견기업과 예비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을 2018년까지 43% 증대한다. 지난해 말 기준 해당 기업군에 대한 지원 규모는 21.6조 원으로 30조 원까지 늘리겠다는 게 목표다. 또 창업, 벤처기업에 대한 LP투자, 공동투자 등의 방식으로 간접투자를 확대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해당 투자 규모는 4621억 원인데 2018년까지 5500억 원 이상의 공동·간접투자를 하겠다는 계획이다. 공급액 기준으로는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 비중을 35%에서 50%로 늘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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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지원 강화 방안을 반대로 풀이하면 기존 대기업그룹에 대한 익스포져 축소를 의미한다. 금융위는 산업은행의 전체 여신 중 경기민감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내은행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표했다. 산업은행의 석유화학, 철강, 조선 산업에 대한 대출비중은 각각 8.4%, 9.9%, 7.3%로 시중은행의 두 배다.
산업은행의 설립 목적과 그 업무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당연한 수치다. 하지만 이처럼 특정 업종에 대한 쏠림 현상을 경계하고 여신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언급을 한 것은 해당 대기업그룹을 향한 '여신 회수'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어 골치를 썩고 있다.
지난 9월 기준 산업은행의 대기업에 대한 익스포져는 100조 9525억 원이다. 전체 기업 익스포져에서 74%를 차지하고 있다. 대기업 익스포져는 2010년 77%에서 소폭 내려앉는 추세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대기업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산업은행은 금융위가 지난 10월 발표한 내용을 내년 업무계획에 반영하고 후속작업을 준비 중이다.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 폭을 늘리고 대기업 비중은 줄이는 포트폴리오 조정 작업에 이미 착수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최근 동부그룹, 현대그룹, STX그룹 등 경기민감업종 영위그룹과 일으킨 마찰은 예견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구조조정을 거치며 STX그룹은 해체되고 동부그룹은 사실상 금융계열사만 남게된 점은 산업은행의 중장기적인 기조가 대기업그룹에 대한 '지원·육성'에서 여신 '감축·회수'로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란 분석이다.
대표적으로 산업은행은 2014년 동부그룹과 구조조정을 진행하며 마찰을 빚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제조업계열 유동성 위기 극복을 위해 산업은행과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자산 매각 방안을 두고는 산업은행과 초반부터 엇나갔고 반목하는 형국이 자주 언론에 노출됐다.
동부그룹과의 마찰, 그리고 동부그룹 구조조정 실패는 다시 산업은행의 역할 재조정 필요성 논란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STX그룹은 구조조정 시작 후 그룹 해체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산업은행은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으로부터 주력 계열사 중 하나였던 STX팬오션 인수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게 했다. STX조선해양에는 수차례에 걸쳐 총 4조 5000억 원을 지원했지만 아직도 추가자금 지원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현대그룹도 2013년부터 3조 3000억원 규모의 자구계획안을 입안하고 지난 10월 말 기준 101%의 자구안 이행 실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현대증권 매각 불발 이후 상황은 반전됐다. 현대그룹이 3조 원대 자산을 팔아 지키려한 현대그룹의 몸통 '현대상선'을 매각해야 한다거나 채권단 관리(워크아웃)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정부 일각에서 최근 흘러나왔다. 조선·해운 등 중후장대 산업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 그룹과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는 추세다.
일각에서는 산업은행의 오락가락 행보 탓에 기업 구조조정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은행 내부 관계자들도 '기업 살리기'와 '강도 높은 구조조정' 사이에서 빚어지는 마찰 탓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산업은행은 IB 특화은행으로 방향을 설정한다든지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요즘엔 정체성이 모호해져 버렸다"며 "그동안 여러 외부 영향력 때문에 혼란스러운 면도 있었으나 미래 성장동력 산업을 지원하는 정부의 방향에 맞추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기업의 구조조정을 한다며 기업들의 관리인에 산업은행 출신이 임명됐고 기업과 산업은행이 한 몸이 돼 버렸다"며 "과감한 개혁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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