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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아산 정주영 레거시]현대와 사우디 주베일 항만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19-11-18 10:00:00

이 기사는 2019년 11월 18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아람코(Aramco)는 사우디의 국영 석유-천연가스 회사다. 곧 기업공개를 거쳐 애플을 제치고 1조 7천억 달러 규모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등극할 예정이다. 아람코는 국내에서 에쓰-오일의 최대주주이고 다음 달에는 현대오일뱅크의 지분도 늘린다.

아람코는 걸프만을 통해 원유를 전 세계로 수출하는 데 바레인 바로 위쪽에 사우디 최대의 항만인 주베일(Jubail) 항만이 자리한다. 주베일은 1975년까지 작은 어촌이었다가 약 1천 평방킬로미터 크기의 세계 최대 산업도시로 변모한 곳이다. 인구는 약 12만. 사우디 GDP의 7%를 담당한다. 사우디의 산업수도인 주베일 산업도시는 1976년부터 미국의 벡텔이 건설했다. 벡텔은 아직도 이 사업을 자사 최대의 프로젝트로 홍보하고 있다.

주베일에는 산업항(King Fahd Industrial Port)과 상업항이 있는데 산업항이 사우디의 9개 항만들 중 1위, 상업항이 5위다. 연 7천만 톤을 소화하는 산업항은 석유, 석유화학제품, 철광석, 비료 등을 선적, 하역한다. 178헥타르의 원유저장시설도 갖추고 50만 톤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한다. 34개의 계류장과 5개의 터미널을 갖추었다. 바로 이 주베일 산업항을 1976~1979년에 현대건설이 건설했다.

현대건설은 1970년 12월에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을 준공한 이후에 바로 해외에 진출했었고 1975년 1월에는 이란의 조선소 건설로 처음 중동에 진출했다. 동년 12월 사우디에서 해군기지 해상공사도 맏았다. 주베일 항만 공사는 그에 이어서 수주한 것이다.

1970년대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었다. 1차는 1973년에 제4차 중동전쟁인 욤-키푸르 전쟁으로 발생해서 유가가 약 400% 올랐고 2차는 1979년에 이란혁명으로 발생해서 유가가 약 100% 올랐다.

특히 1차 쇼크의 타격이 극심했다. 원유 전량수입국인 한국은 외환이 고갈되어서 경제 전체가 붕괴될 위기를 맞았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필자는 어떤 만화가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한국에서 석유가 난다면 국민 전체가 얼마나 부자가 될 수 있는지를 그린 그림을 아직도 잘 기억한다.

김화진 외환은행의 수표가 국제금융시장에서 부도 처리되는 일이 일어나고 관료들이 뉴욕으로 날아가 구제금융에 절치부심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 해 정부 세수의 20%, 예산의 50%인 9억3천만 달러짜리 공사인 주베일 항만공사 수주는 현대건설뿐 아니라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모든 경제각료와 사우디 대사는 현대건설이 공사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우디 정부와 교섭을 다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훈령이 나왔고 실제로 관료와 외교관들은 최선을 다했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은 홍순길 전 사우디 주재 건설관의 회고에 생생하게 나온다(최보식이 만난 사람, 조선일보, 2019.7.29.)

입찰자격이 없어 입찰에 참여할 수 없었던 현대건설은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입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실제로 공사를 따내는 것은 현대건설의 몫이었다. 어렵사리 2천만 달러의 입찰보증금을 마련했고 최선을 다해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결국 공사를 수주했다. 최종계약 체결 시까지 경쟁회사들의 방해도 집요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무수한 난관을 해결한 기록은 정주영 회장의 1998년 회고록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이 땅에 태어나서, 210~231).

공사 선수금 2억 달러가 외환은행에 입금되어서 건국 이후 외환보유고 최고기록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경험, 기술력과 저가 입찰로 인한 비용 절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장비를 대여하는 외국사들이 제멋대로 기승을 부렸고 발주처의 갑질도 문제였다.

결국 울산의 현대중공업에서 중량 500톤, 10층 건물 크기의 구조물(재킷) 89개 등 모든 건설 기자재를 제작하고 1만2천 킬로미터 항로로 직접 수송해서 문제를 다 해결했다. 요즘 문제되는 부품소재 국산화에 해당하기도 하고 거의 40년 전에 오늘날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4차 산업혁명기 건설과 중기계제작 방식(원격지 부품 제작, 현장 조립완성)을 선보였던 것이기도 하다. 정주영 회장도 중공업이 공사에 필요한 지원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고 건설과 중공업의 상호 시너지가 공사를 잘 마무리 짓게 했다고 회고한다.

"중공업을 빼고 ‘현대'의 해외 건설을 말할 수 없고, 해외 건설을 빼고 ‘현대중공업'을 말할 수 없다. 만약 1970년대 초에 우리가 중공업 건설을 하지 않았더라면 1970년대 중반 중동 건설 시장에 진출한 ‘현대건설'의 그 대단한 실적은 불가능했다. 또 반면에 그때 만약 우리가 중동 건설 시장에 뛰어들어 오일 쇼크로 좌초될 위기에 처했던 중공업에 자생력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더라면, 중공업의 오늘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이 땅에 태어나서, 232)

그 후 중동 붐이 일어났다. 현대그룹 총매출의 60%가 해외 건설공사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국가 외화 수입의 85%가 중동에서 발생했다. 국내 건설 인력들이 대거 중동에 진출했고 2~3년 열사에서 고생하면 돌아와서 30평짜리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었다. 현대는 재계 1위로 부상했다.

현대건설 홈페이지에 가보면 이 공사 포함 1978년도 대외 계약 19억 달러로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가 선정한 세계 4위를 차지했다고 자랑스럽게 소개되어 있다. 이 공사는 현대의 입장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사에서도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현대와 사우디의 인연도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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