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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아산 정주영 레거시]현대중공업의 탄생과 리바노스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19-11-27 11:00:20

이 기사는 2019년 11월 27일 10:5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고도 성장기를 그린 한 유명 ‘옛드'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최불암 분)을 불러 조선사업을 시작해 보라고 권한다. 당시 건설 중이던 포항제철의 철강을 소비할 국내 업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아산이 바로 예스를 하지 않고 난색을 표하자 박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재벌이 당신들 것인 줄 알았느냐"고 한 마디 쏘아붙인다. 드라마지만 당시의 정부와 대기업 관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산은 회고록에서 "울산조선소 건설을 두고 혹자는 중화학 공업 선언에 따라 정부가 ‘현대'를 지정해서 조선소를 만들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 얘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한다(이 땅에 태어나서, 160). 1960년대 전반에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업을 마침 정부가 강력하게 권고해서 결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에는 당시 정부의 권유는 강도가 심해서 "성화가 불같았다"고 적혀있다. 드라마에서처럼 대통령이 아산을 직접 채근하지야 않았겠지만 분위기는 바로 그랬던 모양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7~1971년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동안 본격적으로 경제의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1967년에 기계공업진흥법과 조선공업진흥법, 1969년에 전자공업진흥법, 1970년에 석유화학공업육성법과 철강공업육성법, 1971년에 비철금속제철공업사업법이 제정되었다. 정부는 이 법률들을 기초로 특정 산업을 선정해서 재정과 금융 지원을 시행했다. "재벌이 당신들 것인 줄 알았느냐"는 멘트가 사실이라면 이런 배경에서 이해하면 된다.

이렇게 출발한 현대중공업의 성장 역사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다. 아마도 훗날의 구글이나 아마존 정도만이 그 발전의 역동성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4월 조선소 부지 조성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1972년 3월 23일에 조선소 건설 기공식이 있었다.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는 1973년 12월에 아산을 대표이사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4년 2월 드디어 1호선 애틀란틱 배런(Atlantic Baron)이 진수된다. 이 배는 1991년까지 운항했다.

김화진 1978년 2월에 상호를 현대중공업주식회사로 변경했다. 부지 조성을 시작한지 10년도 안 된 1980년 1월에 조선분야 글로벌 10위에 진입했다. 그리고 1986년 12월에 1천만GT(누계 총 335척)을 달성한다. 1999년 8월 상장회사가 되었고 2007년에 수출 100억불 탑을 수상했다. 2008년 포츈지의 글로벌 500에 처음 진입했는데 아산 탄생 100주년이었던 2015년에 세계 최초로 선박 2000척 인도 기록을 세웠다(현대중공업 홈페이지 회사연혁). 이제 현대중공업은 압도적인 글로벌 1위의 조선회사다. 삼성전자와 함께 한 분야 글로벌 1위인 두 한국기업 중 하나다.

아산이 조선업을 처음 시작한 당시의 이야기들은 아마도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기이한 것들이다. 그리고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 지폐,' ‘백사장 사진' 같은 키워드와 함께 글과 영상을 통해 가장 많이 소개된 이야기들이다. 아산의 말대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의 기이한 행적을 보여준다. 여기서 상세히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대한조선공사가 1만7천 톤급을 건조한 실적이 최고기록이었는데 갑자기 50만 톤급을 목표로 했다. 기술과 금융 양쪽 다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결국 포기했다. 드라마에서처럼 실망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호된 질책을 받고 미국, 일본이 아닌 유럽으로 도움의 손길을 구하게 되었다. 박 대통령과의 만남 기록은 아산의 회고록에 있다. 두 사람이 담배를 피면서 말없이 앉아있었다고 한다(165~167).

이 대목에서 영국의 선박컨설팅업체 A&P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이 등장하고 롱바톰의 도움으로 바클리은행의 차관 약속을 얻어낸다. 그러나 배를 사 줄 선주가 없으면 영국수출신용보증국(ECDG)의 보증이 나오지를 않아서 차관을 얻을 수 없었는데 여기서 아산은 자신의 말대로 ‘나보다 더 미친 사람'인 리바노스(George Livanos)를 런던에서 만나게 되었다. 리바노스가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2척의 주문을 냈고 ECDG의 보증과 바클리은행의 차관이 집행되었다. 1970년 12월 5일 선수금 우리 돈으로 14억 원을 한국은행에 입금시키고 귀국해서 바로 박 대통령을 만났는데 뛸 듯이 기뻐한 박 대통령은 조선소 기공식을 재촉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 이후 처음으로 기공식에 참석했다.

1972년 3월에 기공식을 한 조선소가 어떻게 1974년 2월에 첫 선박을 진수했는지는 언뜻 계산이 나오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기록의 착오가 아니다. 아산은 조선소와 선박을 동시에 짓는 ‘엉뚱한' 작업을 해서 성공했다. 강행군의 연속 중에서 아산은 승용차에 탄 채로 바다에 빠져 익사할 뻔하기도 했고 아산의 리더십에 따라 헌신적으로 일했던 조선소의 직원들과 노동자들이 치른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 모든 과정은 말 그대로 천신만고였지만 아산은 조선소 건설과 첫 배를 짓던 시간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활기찼던 시간으로 회고한다.

이제 85세인 그리스인 리바노스는 1878년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 선사 선엔터프라이즈(Sun Enterprises) 회장이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스타브로스 니아코스의 장인 스타브로스 리바노스의 아들이다. 즉, 오나시스의 처남이다. 이들은 모두 세계 해운업계의 큰 손들이었다. 리바노스 패밀리는 1차대전 때 거부를 축적했는데 대대로 런던에서 살았고 아산과의 인연도 런던에서 생긴 것이다.

리바노스는 현대중공업 탄생의 일등공신은 못 된다 해도 이등공신은 된다. 어떻게 보면 일등공신이다. 1호선 이후에도 계속 현대중공업에 배를 발주했고 아직도 고객이다. 그러나 오일쇼크 때는 주문한 배를 찾아가지 않아 아산의 속을 썩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아산은 이렇게 말한다.

"다 만들어진 배를 안 찾아가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하면서 내 부아를 끓게 했던 리바노스를 그래도 나는 결정적인 때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한다. 어쨌든 황량한 모래 벌판 사진 몇 장과 설계도만 보고 배 2척을 주문해 난감했던 차관 도입의 물꼬를 틔워줬던 장본인이 아닌가."(위의 책, 196)

리바노스 패밀리는 아직도 현대중공업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6년에도 선박 명명식에 가족들이 모두 와서 15만9천 톤 급 원유운반선 2척에 자기 고향 이름(Chios)과 딸의 이름(Christina)을 각각 붙이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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