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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아산 정주영 레거시]정주영의 88올림픽 유치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0-01-10 10:00:00

이 기사는 2020년 01월 10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아산이 사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라를 위해서만 했던 일 중 하나가 88년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과 성공이다. 아마도 아산이 가장 크게 국가 경제와 위신 제고, 그리고 외교에 공헌했던 대역사였을 것이다. 스포츠는 물론이다.

당시 문교부 체육국장이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을 들고 어느 날 전경련 회장 아산을 불쑥 찾아왔었다고 하는데 그 사령장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강인한 추진력과 번뜩이는 기지로 ’현대‘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저력과 갖가지 신화를 남기면서 해외에 한국 기업의 위상을 제고시킨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위촉한다고 되어 있었다 한다(이 땅에 태어나서, 271).

제24회 올림픽 서울 유치 구상은 원래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이다. 정부가 그런 방침을 정하고 1979년에 박 대통령이 직접 발표도 했던 일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정치적 상황이 급변했고 박 대통령을 이어받았던 최규하 대통령의 내각은 올림픽 유치 계획을 철회해 버렸다.

그런데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사정이 달라졌다. 일단 5공은 박 대통령이 구상한 일이 백지화된 데 대해 못마땅해 했다. 그리고 정부는 1980년 11월에 IOC에 공식적으로 우리 유치의사를 전했다. 신군부 정권은 스포츠를 크게 장려해서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싶어했고 그 이유로 올림픽 유치가 서울시가 아닌 국가 차원의 사업이 되었다. 정권의 2인자 노태우 당시 정무장관이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회의론이 빗발쳤다. 남덕우 총리는 올림픽 망국론까지 내놓았다. 당시 약 2조 원 정도로 비용 견적이 나왔다. 몬트리올 올림픽이 10억 달러 적자 올림픽이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경쟁 상대는 1977년부터 일찌감치 준비해 온 일본의 나고야였다. 5공 정부가 민주 정부가 아니라는 점도 큰 핸디캡이었다. 이래저래 여의치 않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정부는 신청서를 냈기 때문에 철회를 할 수는 없고 부딪혀 봐야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생각으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민간에 떠넘기려고 정부가 아산을 찾았다는 것이 아산의 생각이었다. 서울시장도 IOC 위원도 나서지 않는 판에 망신 대역으로 전경련 회장이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산이 올림픽 유치에 나섰던 당시 상황이다. 한국 대표단이 서울을 떠날 때 받은 훈령이 ’창피만 당하지 마라‘였다니 말다한 것이다. 더해서, 북한에서도 ’올림픽 유치 방해단‘이 대거 파견되어 왔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의 올림픽 유치가 체제경쟁에서 치명타가 될 것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산은 영어뿐 아니라 독일어도 능통한 후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을 현대중공업에서 불러올려 같이 유럽으로 향했다. 정 이사장은 통역 겸 수행비서 자격으로 동행했는데 출정 때 결의의 악수를 하면서 철들고 처음 아버지 아산의 손을 잡아보았다고 한다(나의 도전 나의 열정, 85).

그 후 유럽 현지에서 아산과 한국 대표단이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는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럽 현지 현대 지사들과 임직원,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모두 같이 뛰었다. 아산의 회고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273~283). 1981년 9월 30일 오후 3시 45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투표결과를 보고 발표한 ”쎄울“은 대표단의 만세 장면과 함께 전국을 뒤흔들었다. 52:27의 압승이었다.

나무위키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옮기면 아래와 같다. 아산의 국제정치 감각을 보여준다.

”특히 정주영 당시 현대 회장 특유의 뚝심있는 행보가 압권이었는데, 유치위원들이 서독의 바덴바덴에 도착한 와중에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의 IOC 위원들과 식사를 했을 때의 일화이다. 당시 식사 도중 영국의 IOC 위원 한 명이 정주영 회장에게 "체육계에서 얼마나 일했는가" 를 묻자, 이에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처음 일하는 것"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위원은 오히려 이에 "초보자를 내보냈다"고 말하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와중에 정주영 회장이 대뜸 "일본은 이미 올림픽과 같은 엄청난 세계적인 행사들을 개최한 이후 엄청난 경제대국으로서 발돋움하고 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만약 이번에도 유치한다면 일본의 경제발전을 더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라고 직언하자 이에 돌연 관심을 갖고 정주영의 말을 귀기울이면서 들어주었다고 한다.“

일본의 부상에 신경이 쓰이던 영국의 위원들로 하여금 마음 돌리게 한 이 일화는 정몽준 이사장의 책에도 소개되어 있다(87~88).

그러나 비협조, 비판으로 일관했던 인사들이 좋은 결과가 나오자 갑자기 생색을 내기 시작하고 올림픽의 성공적인 종료 후에도 민간위원들이 아닌 정부관리들만 줄줄이 훈장을 받는 것을 보고 아산은 매우 실망했다. 그리고 아산은 ”반드시 짚어둘 얘기가 있다“면서 지면에서조차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조로 이렇게 쓴다.

”88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나는 단 1원의 올림픽 관련 수익 사업도 하지 않았고, 단 1원의 올림픽 시설 공사도 하지 않았다“(위의 책, 292).

서울올림픽이 결정된 후에도 일본의 공동개최 책동, 북한의 1983년 아웅산 테러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등 갖은 방해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팀은 금 12, 은 10, 동 11로 구소련, 동독, 미국에 이은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88올림픽 후 한국경제는 이른바 저물가, 저환율, 저금리의 ’3저‘ 시대를 맞이해 크게 도약했고 남북관계에서는 물론 한국의 국제적 위상도 급속히 높아졌다. 국내 정치도 큰 진전을 맞게 된다. 1987년의 6월 항쟁도 88올림픽 때문에 성공적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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