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03월 23일 07:42 THE CFO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세계 금융시장엔 'Cautionary tale(교훈)'이 된 몇 가지 사건이 있다. 장부를 조작한 엔론의 파산이 회계 부정에 경고등을 켰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파생상품의 구조적 위험을 수면으로 올렸다. 위기는 금융질서를 다시 짠 변곡점으로 기록됐다.실리콘밸리은행(SVB)은 딱 40년 전 등장했다. 벤처금융에 대한 이해가 아직 미진했던 시기다. 선구자의 깃발을 든 SVB는 과감한 특화전략을 펼쳤다. 설립 초기부터 스타트업을 겨냥해 성공사례를 써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큰 상업은행이었으며 자산규모로는 미국내 16번째였다.
긴 역사가 무색하게 파산은 급속했다. 팬데믹으로 바이오가 뜨면서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돈벼락을 맞았다. 고객이 부유해지니 SVB에도 달러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갑자기 유입된 자금을 어떻게 굴릴까. 투자처를 고민하던 SVB는 미국 장기국채를 많이 사들였다. 미국이 망하지만 않으면 손해볼 일은 없겠지라고 경영진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금리 상승이 기록적으로 이어졌다. 초안전자산이라는 국채 가격도 곤두박질쳤다. 여기서 끝나면 좋았을텐데. 재무건전성이 흔들린 SVB가 자본확충 계획을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채권매각 손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고 바로 다음날 투자자들의 뱅크런이 시작됐다. 파산까지 고작 44시간 걸렸다.
놀랍고 허무한 몰락이지만 숨겨진 전조가 이미 있었다. SVB는 위험 분석을 위해 2020년 블랙록을 자문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블랙록은 '리스크 통제가 기준에 매우 못 미친다'는 경고를 지난해 초 SVB에 날렸다. SVB가 증권 포트폴리오 현황을 실시간은커녕 주간으로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속조치 제안을 SVB는 묵살했다. 당시 최고재무책임자(CFO) 다니엘 벡의 초점은 이자수입에 있었다. 부임 뒤 단기물보다 수익률 높은 만기 10년 이상의 국채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꾸렸던 것도 그래서였다.
벡이 선택한 전략은 자기자본 수익률을 대폭 끌어올렸지만 갑작스런 금리상승엔 대책없이 취약했다. 만기가 긴 채권일수록 금리인상의 타격을 크게 받는 탓이다. 결국 벡은 SVB 주주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했다. SVB의 우화(寓話)는 여기까지다.
후폭풍이 국내 은행까지 미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업종을 떠나 유가증권 자산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보험사, 금융자산 비중이 많은 기업은 자산 분배의 리스크 측정법을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식과 채권 가치가 같이 떨어지면서 보험사들은 지난해 평가손실로 벌써 쓴맛을 봤다. 삼성생명의 경우 16조원에 이르는 자기자본이 증발한 상태다.
아무튼 블랙록 창업자인 래리 핑크가 했던 얘기가 있다. "모든 학문적 연구는 이익에 대한 기쁨보다 자본 손실의 공포가 더 크다고 말한다." 진리인 줄은 모르겠으나 CFO라면 새겨야 할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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