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뉴 웨이브]클래식도 팬덤몰이… '크로스오버'의 딜레마③미디어 경연프로그램 통한 대중성 유입…정통 클래식 '훼손' 우려도
고진영 기자공개 2024-04-17 10:35:54
[편집자주]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은 철학책 읽기와 비슷하죠.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고, 음악은 전부를 위한 게 아니거든요."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크쉬스토프 펜데레츠키가 했던 씁쓸한 말이다. 청중이 있어야 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면서도 대중성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런데 만년 겨울이던 국내 클래식 음악 시장에 온기가 들고 있다. 크로스오버 장르의 약진, K-클래식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쟁쟁한 스타 연주자들의 등장이 발판으로 작용했다. 대중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현재를 더벨이 살펴봤다.
이 기사는 2024년 04월 15일 07:4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크로스오버'라는 말은 종종 마뜩잖은 시선에 부딪힌다. 클래식 음악의 품격을 해치는 게 아닌가 하는, 이른바 순수 클래식 애호가들의 의심과 불용(不容)이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은 역사적으로도 장르의 교차를 통해 발전해왔다.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중적 징슈필(Singspiel), 즉 독일식 뮤지컬을 섞었고 말러의 교향곡 8번은 오라토리오와 연가곡을 융합해서 작곡했다. 인류 최고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베토벤의 장엄미사(Missa Solemnis) 역시 르네상스 다성음악과 바로크 대위법, 낭만주의를 넘나든다.
◇넥스트 '일 디보' 노린 <팬텀 싱어>
클래식음악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대중음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70년대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 등 디스코와 현악 오케스트라의 크로스오버가 유행했으며 1990년까진 컨트리음악과 클래식의 크로스오버가 활발했다(컨트리 순수주의자들은 이런 트렌드를 기피했지만). 또 시대의 아이콘 폴 매카트니는 <리버풀 오라토리오>를 시작으로 클래식 음반을 여러 차례 내놨다.
국내에선 30여년 전부터 크로스오버를 통한 대중화 시도가 있었다. 1989년 발표된 김희갑 작곡의 대중가요 <향수>가 대표적이다.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듀엣으로 불렀는데 클래식 음악계에선 순수성 훼손이라는 반발이 일기도 했다. 실제로 앨범이 170만장 넘게 팔리며 대중적 흥행에 성공했으나 박인수는 이후 국립오페라단원 임용에서 탈락했다. 업계에서 크로스오버를 단순한 일탈로 흰 눈 뜨고 보는 시선도 여전했다.
논란과 별개로 현대에 와서 클래식 음악의 크로스오버가 청중을 늘리기 위한 필사적 시도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클래식 음악이 가지고 있지 못한 일반가요의 대중성을 탐낸 노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벽을 낮춰준 계기가 방송 경연프로그램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JTBC <팬텀싱어>는 2016년 처음 방영했다. 크로스오버 남성 4중창을 결성하기 위한 JTBC 경연대회다. 지난해 시즌 4까지 제작되면서 시즌마다 포르테 디 콰트로, 포레스텔라, 라포엠, 리베란테 등 4개 우승팀을 탄생시켰다.
<팬텀싱어>가 굳이 남성 4중창을 기획한 이유는 영국 팝페라 그룹인 '일 디보(Il Divo)'를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음악 프로듀서이자 사업가,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은 2003년 4인조 중창팀 일 디보를 꾸렸다. 2년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오디션을 거쳐서 추린 멤버들이다.
일 디보는 기존 클래식 중심의 팝페라 가수와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일 디보를 진지하게 보지 않는 기존 클래식 애호가들의 시선에도 불구, 클래식 음악보다 팝송을 위주로 불렀고 엔딩을 오페라 스타일로 바꾸는 방법 등으로 차별성을 뒀을 뿐이다. 멤버 중 3명이 오페라 교육을 받았어도 오페라 레퍼토리는 부르지 않았다. 오페라 음악이 아닌 오페라 음색을 사용한 크로스오버였던 셈이다.
이 그룹의 테너 데이비드 밀러는 "우리는 클래식 방송국에 비교하면 너무 팝적이고, 팝 방송국에선 너무 클래식하다"며 라디오 시장을 뚫는 어려움을 얘기하기도 했지만 일 디보는 결성 후 5년 동안만 무려 2500만장의 앨범을 팔아 치웠다.
◇크로스오버그룹, 압도적 티켓파워…'정통 클래식' 불안은
<팬텀싱어> 출신 그룹들 역시 팝 리메이크 위주의 음악으로 대중을 공략한다는 측면에서 일 디보의 성공을 일부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오디션이 진행되고 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충성도 높은 대규모 팬덤이 만들어진다. 이후에도 <불후의 명곡> 등 경연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해 노출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시즌2 우승팀인 포레스텔라는 클래식 공연에서 압도적 티켓파워를 자랑 중이다. 지난해 클래식 공연 매출 상위 10개 공연 가운데 4개를 포레스텔라 콘서트가 차지했다. 또 지난해 초 크로스오버그룹 최초로 미주 5개 도시 단독콘서트 투어를 돌기도 했다.
포레스텔라는 성악가 조민규(테너), 뮤지컬 배우 출신인 배두훈(테너), 직장인밴드 보컬이었던 강형호(테너, 소프라노), 성악가 고우림(베이스)이 멤버로 있다. 절반은 정통 클래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반면 시즌3팀 라포엠과 시즌4팀 리베란테는 전원이 성악 전공자로 구성됐다. 크로스오버 점프를 시도하는 클래식 전공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다 보니 클래식 음악계에선 다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성악 전공자들이 클래식 무대에서 경험을 쌓기도 전에 크로스오버로 빠질 수 있다는 불안이다. 다만 이런 비판을 마냥 나이브한 오만함으로 치부하긴 어렵다. 마이크를 쓰는 크로스오버 음악과 정통 클래식 성악은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크로스오버 아티스트의 성공은 대부분 정통 클래식 음악가와 비교해 기술적, 음악적으로 더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에게 판매되는 방식에 의존해서 이뤄지는데, 대중이 크로스오버 가수와 순수 오페라 가수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믿게 된다면 오히려 기존 클래식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다"며 "하지만 새로운 청취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크로스오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라는 게 딜레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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