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4년 09월 05일 07:4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정정을 요구하겠다."두산그룹은 이 한마디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수건을 던졌다. 오래 체력을 키우고 다양한 플랜을 준비했지만 강력한 어퍼컷 한방에 모든게 무너졌다.
두산그룹이 발표한 사업구조 재편 방안은 상세히 들여다봐도 법적으론 문제가 없었다. 그룹 오너로서 최적의 타이밍에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룹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라는 명분 역시 뚜렷했다.
대법원 판례도 두산에게 긍정적인 시그널이었다. 현행법상 분할·합병 등 기업구조개편은 상법이 정하는 이사회, 주주총회 등의 절차를 준수하고 자본시장법 등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합병가액과 비율을 산정하는 절차를 준수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적법하다고 했다.
하지만 소액주주와 지배주주의 이해상충이라는 대립적 구도가 형성되면서 경기는 처음부터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맞기 전까지는"이라는 마이크 타이슨의 말처럼 의외의 복병들이 잇따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액투자자들은 밥캣과 로보틱스 주식의 포괄적 교환 과정에서 로보틱스의 가치가 부풀려지면서 대주주만 이익을 챙기는 거래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약 200억원의 영업적자를 낸 로보틱스의 1주와 같은 기간 1조원을 번 밥캣의 주식 0.63주가 같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금융감독원이 '증권신고서 퇴짜'라는 기름을 부으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길이 번졌다. 일반주주의 이익이 부당하게 저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분을 바탕으로 두번에 걸쳐 신고서 정정을 강제했다. 해당 신고서가 금감원의 수리를 받아야 지배구조개편안을 임시 주주총회 표결에 부칠 수 있기 때문에 압박은 컸다.
원래 기업의 분할·합병은 주주들의 의사결정 기구인 주주총회가 가장 큰 장애물이다. 계획대로라면 주주총회를 통해 특별결의 승인 요건을 충족하면 됐다. 즉 출석 주주의 2/3 이상과 발행주식 수 1/3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된다.
안팎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산은 증권신고서 제출 전에 관행적으로 진행하던 감독당국과의 사전 협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일련의 사태는 '괘씸죄'의 연장일까. 과거 수많은 인수합병(M&A)과 사업 재편을 통해 당국과 소통 채널을 가졌을 두산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과연 감독당국의 딴지가 적절한 권한인지 궁금하다.
감독당국이 주주가치를 저해할 수 있는 지배구조 재편에 대해 감시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다만 직접 규제가 어느 정도 수준이면 허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어 자의적인 규제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실제 자본시장법 제120조는 증권신고서에 대해 제2항에서 수리 행위의 성격에 대해 알리고 있다. 여기서는 법에 열거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수리를 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감독당국의 직접 규제가 아니더라도 시장을 통해서도 이번 건은 충분히 견제될 수 있다. 소액주주든, 기관투자자든, 지배주주든 해당 방안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면 찬성할 것이고 불리하면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금, 펀드 등 기관투자자 역시 분할·합병 추진 대상회사에 주주관여를 통해 적극적인 입장표명을 하고 분할합병안에 대한 찬성·반대 의사표시를 통해 시장여론을 형성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올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두산에너빌리티 지분 가운데 소액주주 비중은 63.4%다. 핵심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공단의 지분율은 6.78%다. 그룹 지주사인 ㈜두산(지분율 30.39%)을 비롯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30.67%다.
산술적으로 소액주주와 국민연금, 기관투자자가 연대하면 두산그룹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다. 앞서 SK 사례에서도 국민연금은 반대표를 던져 두산도 반대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일반주주를 배려하지 않은 무신경한 두산을 무작정 편들자는게 아니다. 감독당국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규제 권한을 어디까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시장에선 관치 금융에 이어 관치 산업이란 용어까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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