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기사는 2008년 10월 16일 12:1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장면 #1. 1997년 국회 한보 청문회
한보 청문회에 두 신용평가사 대표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한보의 철강사업에 대한 평가의견이 달랐던 두 평가사의 대표이사는 극단적으로 다른 대우를 받았다. 직원들에게 막걸리라도 받아주라는 덕담과 애널리스트의 무능이 운위되는 치욕스러운 상황이 교차했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평가 실패와 위기, 그리고 책임이 있었을 뿐이다.
장면 #2. 2000년 7월 현대건설
다소 이른 여름 금융권의 고위직들이 서울을 떠나 제주도의 세미나에 모였다. 한국형 다보스 포럼이 열리던 그 시점에 평가사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진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의 디스카운트와는 별개로 한국 평가사의 등급결정으로는 상당히 전격적인 것이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강화된 평가사의 야성이 표출된 사건이지만, 동시에 그 야성에 대한 일각의 불안감과 통제 필요성을 자각시킨 계기가 되었다. 아직 시장의 우군은 형성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투자자들은 평가사에 극심한 비난을 쏟아냈다.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은 13개월 만에 투자등급을 회복하고 초단기에 위기는 수습되었지만, 평가사의 공헌은 잊혀지고 반란의 상처만 깊게 남았다.
장면 #3. 2002년 말 카드위기 전야
카드사의 신용이슈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이 커지고 투매도 등장했지만 평가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국은 조금씩 카드사에 대한 규제수준을 높였다. 금융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뚜렷한 방향성이 읽혀졌다. 카드사의 자금조달은 은행에서 자본시장(카드채, ABS, CP)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평가사는 Gatekeeper가 아니라 Doorman이었다.
조금씩 조여 드는 규제의 고리에 갇힌 탓일까? 강화된 자기검열 때문일까? 시장과 유리된 그들만의 집단사고(Groupthink) 때문일까? 어쨌든 평가사의 야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드디어 암묵의 결계가 풀리고 채권시장이 공황으로 치닫고서야 신용등급은 소폭 조정되었다. 그래도 청문회는 없었다.
장면 #4. 2008년 10월
안팎으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서브프라임 이슈가 국제 금융시장을 경색시키고, 이것이 우리 은행의 외화유동성 위기로 옮겨왔다. 단기외화채권/채무의 외견상 밸런스는 이미 무의미해졌다. 채권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무역금융은 사실상 붙박이인데, 해외 차입의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안으로는 건설부동산의 신용이슈가 날로 압박을 더하면서, 점차 그 부담이 은행으로 전이되고 있다. 주요 건설사의 현금흐름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은행의 건설부동산 대출은 꾸준히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당국의 건설사 지원 의지는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뿐이다.
국내외 이슈는 가운데 고리인 은행의 자금 이슈로 모이고 은행의 신용 스프레드는 국내외 공히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은행 예금 지급보증과 실질적인 국유화 뉴스가 이어지고, 당국자는 비공개 회의에서 은행의 자본확충 필요성을 제창했다(한경, 2008.10.14). 글로벌 평가사는 차츰 고삐를 조여 온다. 하지만 우리 은행의 신용이슈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여전히 미미하다.
질병을 다스릴 때는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바탕으로 꾸준한 치료를 해야 한다. 현실에 맞닥뜨리는 것을 회피하면서 진통제에만 의존하다가는 시기를 놓쳐 낭패하게 된다. 구조조정과 자본확충이 위기의 수습 과정이라면, 신용이슈에 대한 논의는 그 출발이다. 은행에 대한 시장의 절대 의존과 정부 개입에 대한 기대를 탓할 것인가? 신용평가가 침묵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해악이다.”-데카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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