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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 “품질 1위”의 딜레마

조헌성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공개 2011-01-24 07:09:34

[편집자주]

자본시장 발전에 신용평가는 인프라와 같은 존재입니다. 서브프라임사태로 신용평가의 공정성이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것도 신용평가의 중요성을 재차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더벨은 신용평가를 포함해 크레딧시장의 전반을 전문가의 날카로운 시각을 통해 분석합니다. 신용이슈 등 일련의 현상에 대해 폭넓은 이해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2011년 01월 24일 07:0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신용평가는 금융시장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시스템중의 하나이다. 또한 그 정상적인 작동 여부가 금융시장, 특히 채권시장의 효율성을 좌우하기도 한다. 해서 국내건 해외건 간에 금융시스템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신용평가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화두에 오르내린다.

신용평가가 금융시장에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요건은 신용등급의 신뢰성이다. 투자자들이 믿지 못하는 신용평가는 신용위험에 대한 핵심지표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신용평가의 신뢰성은 신용평가사뿐만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금융시장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보호해야 하는 절대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신용평가와 관련된 규제와 제도의 대부분이 신용평가의 신뢰성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작금에 신용평가사가 처한 환경은 신용평가의 신뢰성을 보호하고 강화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비록 일부에 그치고는 있지만 최근 들어 채권발행을 주관하는 증권사들로부터 우호적인 신용평가가 가능한지에 대한 문의를 받는 일이 있다. 기업들이 보다 나은 신용등급을 받기 위해 Cherry Picking을 하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채권을 인수, 중개하는 주관사로부터의 이러한 문의는 신용평가를 둘러싼 우리 금융시장의 현재를 스케치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시중에 넘쳐나는 유동성과 증권사간 치열한 인수경쟁으로 발행기업에 대한 증권사의 교섭력이 약해져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일부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쯤으로 보아 넘길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신용평가의 신뢰성에 대한 요구가 가장 커야 할 투자자 층에서의 이러한 태도는 소비자 스스로가 품질이 나쁜 물건을 만들어달라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某 언론사에서 주관하는 신용평가사에 대한 전문가설문 결과 특정 평가사가 최근까지 수회 연속 신뢰도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해당 평가사로서는 시장에서의 호평이 반갑기만 하여야 할 것이다. 제조업체로 치면 “품질지수 1위” 혹은 “소비자만족도 1위” 등에 견줄만한 쾌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나라 신용평가의 현실이다. 이유는 신뢰도 1위가 자칫하면 시장지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용평가에서 “신뢰도 1위”는 발행기업에게 “보수적인”, “깐깐한” 등의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다. 발행기업이 평가사를 결정하는 현실에서 “보수적인” 평가사는 회피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신뢰도가 높은 평가사의 커버리지(신용등급 보유율)가 낮아질 수 있는 까닭이다.

평가사로서의 소명에 충실했다는 시장에서의 박수에 대한 대가로 평가사로서의 위상을 걱정해야 하는 웃지 못할 광경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일반적인 시장이라면 같은 조건하에서 품질과 서비스가 좋은 평가사의 시장지위가 높아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용평가시장에서는 이러한 일반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용평가사의 선택이 정보수요자인 투자자의 의사는 배제된 채 발행기업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발행기업이 교섭우위에 있는 상황에서는 투자자가 신용평가의 신뢰성을 보호할 여유가 없다.

신용평가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용평가사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분석기법을 선진화하고 공정하고 신속한 의견개진을 통하여 자본시장에서의 필수재로서의 위상을 다져가는 것은 분명 평가사의 몫이며, 평가사 자신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분석기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최종 수요자인 투자자가 신용평가의 신뢰성에 관심이 없다면 그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더욱이 평가대상이 되는 기업이 “신뢰성”보다는 “우호적인” 평가사를 선택하는 상황에서 투자자가 뒷짐만 지고 있다면 신용평가사의 노력만으로 신용평가의 신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신뢰성 향상을 위한 투자와 노력의 결과로 시장지위가 떨어지고 수익이 감소한다면 평가사간 신뢰성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용평가의 신뢰성 제고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신뢰성”과 “시장지위”가 正의 상관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환경조성과 제도개선이다. 신뢰성이 높은 평가사가 시장지위도 높을 수 있다면 신용평가의 신뢰성에 대한 더 이상의 논쟁은 없을 것이다.

물론 신용평가 의뢰가 발행기업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제약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성 강화를 위한 대안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다. 신용평가사 선정 시 투자자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의 조성, 신뢰성 높은 평가사에 대한 Favor 부여, 신뢰성 강화에 초점을 맞춘 의뢰구조의 개선 등 여러 대안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금융위기를 거쳐오면서 시장안정을 위한 여러 대책들이 시행된 바 있다. 완전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채권시장도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장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만큼 지금은 시급성에 묻혀 되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용평가의 신뢰성 제고”라는 주제 역시 실질적이고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신용평가의 “신뢰성”은 신용평가사가 소명의식에 근거하여 홀로 가꾸어 나가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는 신용평가사의 노력과 함께 금융시장, 정책당국 등 이해관계자 각자의 역할이 병행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한 가치이다. 신용평가의 실질적 수요자인 금융시장에서는 “신용평가의 신뢰성” 이라는 자신의 Needs가 명확히 반영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야 할 것이다. 더불어 정책당국은 신뢰성 있는 신용평가사를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해법 찾기에 나서야 한다.

신뢰성 높은 평가사가 시장지위도 높을 수 있다면 평가사간 품질경쟁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며, 결과적으로 신용평가의 신뢰성은 한층 나아질 것이다. “품질 1등” 신용평가사가 시장지위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하루빨리 없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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