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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캐피탈리스트의 직업 윤리 [thebell desk]

박상희 벤처중기1부장공개 2024-04-09 07:57:40

이 기사는 2024년 04월 04일 07:4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프랑스 종교 개혁자 칼뱅은 직업을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기 몫의 일’이라고 했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히 종사하는 것이 바로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라는, 이른바 '직업 소명설'이다. 신이 사람에게 각자 맡아 해야 할 일을 정해줬다는 종교에 기반한 주장은 현재 관점에서 볼 때 쉽게 수긍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다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 유효한 부분도 있다. 직업을 신의 거룩한 부름, 즉 신의 '소명(召命)'으로 이해한 칼뱅은 직업적 성공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했다. 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운칠기삼’과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실제로 월급쟁이가 재테크를 통하지 않고 급여만으로 막대한 부를 축척하는게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임을 인정한다면 직업적 성공에 따른 재산의 축척이 신의 은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주장을 온전히 부인하지만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부를 축척할 수 있을까. 개인 편차는 있겠으나 전통적으로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꼽을 수 있다. '선비 사(士)'를 쓰는 변호사, 변리사, 조종사나 '스승 사(師)'를 붙이는 의사가 이에 해당한다. 금융권에서 최근 핫(hot)하게 떠오른 직업은 단연 벤처캐피탈리스트다.

IB(투자은행) 업무의 꽃이라 불렸던 IPO맨이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되기 위해 거쳐 가는 커리어 패스(path)로 전락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금융권뿐만 아니라 산업계에서 벤처캐피탈 업계로 넘어오는 경우도 다반사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금전적인 동기부여가 큰 부분을 차지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연간 인센티브를 포함해 몇백억원의 급여를 받는 몇몇 스타 심사역의 등장이 기폭제가 됐다.

벤처캐피탈리스트가 인기 직업으로 부상하면서 역설적으로 벤처캐피탈은 인재 이탈에 따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대표펀드매니저(대펀)나 핵심운용인력(핵운)이 되기 위한 최저 허들은 각각 5년, 3년이다. 몇 년에 걸친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 이제 대펀이나 핵운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더 높은 직급과 연봉을 보고 회사를 옮겨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단순한 인재 이탈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대펀이나 핵운으로 이름을 올린 심사역이 회사를 옮길 경우 LP(출자자)로부터 관리보수 30% 삭감이라는 상당한 수준의 페널티를 받는다. 회사의 매출 및 이익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위탁운용사(GP) 선정 과정에서 심사역의 운용 철학과 트랙레코드를 중요하게 여기는만큼 인력 이탈에 대해 페널티를 주는 LP의 관행도 이해는 간다. 대다수 벤처캐피탈도 페널티 제도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제도를 오용하거나 악용하는 이들이다. 한 VC 대표는 심사역을 믿고 대표펀드매니저를 맡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을 시켜주지 않으면 회사를 옮기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들었다며 혀를 찼다. 벤처펀드 운용기간은 통상 8년이고 4년 이내에 투자금이 소진된다. 투자금이 일정 수준 이상 소진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펀이나 핵운이 이탈할 경우 회사가 받는 페널티를 빌미로 사실상의 승진 거래를 제안한 셈이다.

또 다른 VC 대표는 “이직 생각이 있는 심사역이라면 대펀이나 핵운 제안이 왔을 때 이를 거절하는 게 그동안 몸담았던 회사에 대한 예의”라면서 “벤처캐피탈 업계 역시 당장 이름값을 할 수 있는 심사역 구인이 급하더라도 동종업계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인물을 채용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렸을 적 가졌던 꿈으로서의 직업은 자아실현에 가깝다. 그러나 취업과 이직의 시기가 다가오면 직업과 직장은 생계수단으로서 의미가 강해진다. 더 높은 직급(직책)과 급여 등이 그 기준이 된다. 누구에게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 이직하는 벤처캐피탈리스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본인의 이름을 걸고 만든 펀드를 책임지지 않고 더 많은 먹잇감을 찾아 철새처럼 떠돌아다니는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모험자본 시장의 물을 흐릴까 걱정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되기를 꿈꾸는 시대에 실제 그 직업을 가진 이들은 '선택 받은' 자들이다. 설사 그 선택이 신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도 말이다. 선택 받은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이 정직, 성실, 신의, 책임 의식, 직업적 양심 등 직업 윤리에 대해 한번 더 곱씹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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