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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 아트]이병철의 호암, 이건희의 리움①2대에 걸쳐 가야금관·인왕제색도 등 문화재 150여점 수집…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

고진영 기자공개 2024-01-23 07:30:41

[편집자주]

기업과 예술은 자주 공생관계에 있다. 예술은 성장을 위해 자본이 필요하고 기업은 예술품에 투자함으로써 마케팅 효과를 얻는다. 오너일가의 개인적 선호가 드러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특히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사회에 공헌한다는 점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성격도 갖고 있다. 기업이 운영하는 예술 관련 법인의 운영현황과 지배구조, 소장품, 전시 성향 등을 더벨이 짚어봤다.

이 기사는 2024년 01월 18일 11:2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수집은 대개 비싸고 고생스러운 취미다. 특히 미술품 수집이 그런데, 돈이야 다다익선이지만 재력가라고 해서 꼭 좋은 컬렉션(Collection)이 모이진 않는다. 그래서 삼성가(家) 수집품은 슈퍼 콜렉터들의 이상향이나 마친가지다. 리움만 봐도 사립미술관으론 국내에 따라올 곳이 없을뿐더러 미술사적으로 족적 깊은 소장품을 여럿 가졌다.

이 삼성가의 미술품 컬렉션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 소유, 그리고 오너일가 개인이 가진 작품으로 나뉘어 있다. 모두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이 관리한다. 고(故) 이건희 회장, 홍라희 전 관장의 수집품이 리움에 전시되거나 다른 미술관에 협조 출품되기도 했다. 리움 소장품으로 알려진 작품이 오너 소유였던 경우가 있는 것은 그래서다.

특히 삼성문화재단이 문화예술 향유의 저변을 크게 넓혔다는 데엔 이견을 찾기 어렵다. 수집벽으로 유명한 철학가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소유는 사람이 객체와 가질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관계”란다. 삼성문화재단 미술품들은 이런 집요한 소장욕과 사회환원의 교차지점에 있다.

◇수집가의 '공수래공수거'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은 집착에 가깝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던 사람이다. 떠도는 일화가 있는데 인천 강화도에서 출토된 ‘청자 진사 주전자’가 1970년 초 일본 오사카 경매에 등장하자 그는 “무슨 수를 써서도 찾아오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치열한 경합 끝에 결국 3500만원을 주고 손에 넣었다고 한다.

당시 자장면 한그릇에 100원, 쌀 한가마니에 6000원쯤 하던 시절이니 3500만원이면 대충 13억원 정도다. 도굴꾼이 가지고 있던 것을 백지수표를 주고 사들였다는 설도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이 주전자는 국보로 지정됐으며 이후 호암미술관에 넘어갔다.

호암미술관은 1982년 문을 열었다. 이병철 회장은 1970년대 들어 보유 컬렉션이 1000점을 넘자, 수집품 공개와 보존이 필요하다 여겼다. 생전 호암미술관을 지어 30년간 모은 소장품 1167점을 기증했다. 엄청난 부를 쌓은 그에게 돈만 안다는 폄하의 뜻을 담아 ‘돈병철’이란 별명이 붙어있던 시기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이 직접 써서 남긴 서예 유품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라는 글귀가 적혔다.


당시 호암미술관에 기증된 미술품들엔 국보 12점, 보물 9점이 포함됐다. 대표적 소장품 몇 가지를 훑어보면 이 회장이 가장 사랑했다는 국보 ‘가야금관(전 고령 금관)’을 먼저 말해야 한다.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 왕의 신분장식이다. 이병철 회장이 매일 아침마다 금관부터 확인할 정도로 애착이 컸다고 전해진다.


또 고려 불화인 국보 ‘아미타삼존도’를 구하는 데도 애를 태웠다. 당시 일본 사립박물관에서 한국엔 절대 팔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을 이 회장이 비밀리에 사왔다. 미국에 있는 삼성물산 지사까지 동원했을 정도로 복잡한 과정이었다. 수집가의 진정한 기쁨은 획득의 스릴에 있다고 하니, 이 회장이 느꼈을 승리감과 안도는 대단했을 것이다.

◇이씨 집안 미술관 '리-뮤지엄'

미술품에 대한 이병철 회장(사진)의 애정은 아들 이건희 회장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다만 부자(父子)는 취향이 많이 달랐다. 부친이 청자를 좋아했던 것과 달리 이건희 회장은 깨끗한 백자를 선호했다. 이병철 회장은 값을 따지는 편이라 비싸다 판단하면 사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좋다고 생각하면 값을 묻지 않았다. 명품 하나가 나머지 컬렉션의 가치까지 높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이 1980~1990년대 집중적으로 ‘국보 100점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이병철 회장보다 많은 고미술품을 사모았을뿐 아니라 현대미술품도 수집했다. 삼성가를 통틀어 도합 150건이 넘는 국보와 보물을 소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호암미술관이 개관했을 때와 비교하면 일곱 배가 넘게 불렸다. 당시 미술시장이 활황이었던 데다 운이 따른 덕분도 있지만 이건희 회장의 지원과 안목, 의지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1997년엔 이건희 회장이 컬렉션을 보관, 전시하기 위한 미술관 터를 찾기 시작했다. 경복궁 동편의 송현동 부지를 낙점해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땅을 사들인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터진 데다 개발허가도 나지 않아 좌초됐다. 결국 한남동 자택 주변의 땅을 조금씩 사들여 모은 부지에 2004년 리움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리움은 이(Lee)씨 집안의 미술관(Museum)이라는 뜻이다. 건축은 마리오 보타, 렘 쿨하스, 장 누벨 등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 세 명이 한 동씩 맡아 3개동을 지었다. 건축물 자체만으로 예술품이란 평을 듣기도 했다. 아름다운 건축물은 훌륭한 박물관의 필수 요건이다.


이렇게 설립된 이후 리움은 이중섭의 드로잉전(2005)과 ‘앤디 워홀 팩토리’전(2007), 서도호 개인전 ‘집속의 집’(2012) 등 20건이 넘는 기획전을 열었다. 디지털 돋보기를 배치해 유물의 질감을 세시히 살필 수 있게 하는 선구적 시도를 하기도 했다. 미술관 운영에 있어선 이만큼 모범적인 케이스도 국내에 없다. 예술계 관계자는 “소장품만으로 상설전이 가능한 기업미술관 자체가 손에 꼽는다”고 말했다.

호암미술관 이후 기업들의 미술관 설립이 번지기 시작했지만 삼성처럼 구색 맞추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소장품을 늘려간 사례는 드물다. 반면 리움을 추가로 짓기 전에도 호암미술관은 소장품의 시대, 유형이 들쑥날쑥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개관 뒤에도 계속해서 컬렉션을 확장했다. 국내 기업미술관을 선도한 것이 호암과 리움이다.

◇리움 떠난 '이건희 컬렉션'

그러나 2020년 이건희 회장이 별세하면서 삼성가는 컬렉션의 적지 않은 부분을 떠나보냈다.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을 비롯한 유족들이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기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애초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일부는 공익재단인 삼성문화재단(리움)에 기증될 것이란 예측이 상당했으나 결국 한 점도 리움에 남지 못했다.

가령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리움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 중 하나였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이밖에도 국보 14건과 보물 46건을 포함한 2만1693점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흐·샤갈·피카소 등 서양 근대 미술사와 한국 근현대회화작품 등 1488여점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갔다.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할 경우 ‘같은 주머니’라고 여길 수 있는 국민정서를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 이슈되면서 물납제 논의에 다시 불이 붙기도 했다. 물납제는 상속세의 일부를 미술품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지난해 초부터 물납제가 시행됐지만 정작 삼성그룹 오너일가는 활용할 수 없는 처지다. 2023년 1월1일 이후 상속 개시분부터 이 제도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외국 사례를 보면 영국과 프랑스 등은 물납제가 일찍부터 자리잡았다. 작품 기증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미술관으론 프랑스 파리 피카소미술관이 있다. 피카소의 사망 후 유족이 상속세 대신 200여점의 작품을 정부에 납부해 세워졌다. 또 미국은 물납제는 없으나 기부, 기증에 그와 다름없는 혜택을 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소장품의 80% 이상을 기증받았다. J.P 모건이 미술품 7000점을 기부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삼성가 입장에선 아쉬운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한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기증 덕분에 국내 미술계 수준이 세계적으로 높아졌지만, 오너일가는 기증품 상속세가 면제된 것 외엔 세제혜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모아 보존하는 일은 시대적 의무"라는 이건희 회장의 다짐은 리움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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