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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글로벌 금융기관의 시조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4-10-02 09:00:17

이 기사는 2024년 10월 02일 09:4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글로벌 금융과 금융기관의 역사 공부는 이스라엘의 작은 항구도시 아크레를 방문하는 여정으로 시작하면 되겠다. 아크레는 텔아비브에서 북쪽으로 114km 거리에 있다. 하이파 바로 위다. 멀지 않기 때문에 나는 텔아비브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주말을 이용해서 당일 관광 프로그램으로 다녀왔다. 아크레는 ‘어쌔신 크리드’의 무대이기도 하다.

아크레를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구시가 해변 끝자락에 상당한 면적으로 얕은 수면 아래 인공지형이 있다. 구시가 전체 넓이의 1/5은 족히 될 것 같다. 히스토리채널에서 옛 아크레를 탐사한 프로그램에 따르면 그 유적은 중세에 있었던 거대한 바닷가 성채의 기반이다. 그 성채는 템플기사단(Knights Templar: 1119∼1307)의 본부였고 레반트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였다. 1187년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뺏기고 옮겨왔던 자리다. 1291년 아크레에서의 마지막 전투 패배로 템플기사단은 같이 있던 구호기사단과 함께 아크레를 떠났다. 그로써 1099년에 시작했던 예루살렘왕국은 약 200년 만에 막을 내린다.

템플기사단은 국제금융의 시조, 최초의 글로벌 금융기관으로 여겨진다. 무장 수도사들의 군사 조직이었지만 예루살렘과 아크레, 그 후에는 프랑스 파리를 본거지로 해 전 유럽과 중동에 걸친 막대한 재산과 조직망을 갖추었다. 그를 통해 축적된 지식과 정보로 이들은 최초의 글로벌 금융기관 역할을 했고 유럽 왕들의 후기 십자군 원정에 병력과 함께 자금도 지원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레반트 지역으로 성지순례를 가려면 왕복에 수개월이 걸렸을 텐데 문제는 돈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당시 돈은 무거운 주화였다. 몇 달을 쓸 돈은 무게가 꽤 되었을 것이고 더 중요한 점은 도적에게 뺏길 위험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된다. 예컨대 템플기사단 파리 지부에 가서 돈을 맡기고 종이를 한 장 받는다. 그 종이를 가지고 여행을 한 다음 기사단의 예루살렘 지부에 가서 제시하면 지부에서는 수수료를 뗀 후에 현지 화폐를 내준다. 순례 여행이 편하고 안전해졌다.

여기서 등장한 ‘종이’는 바로 우리가 환어음이라고 부르는 유가증권이다. 그래서 인류가 꽤 오랫동안 사용한 환어음의 원형을 이 기사단이 고안해 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는 않은 상태다. 텔아비브대 법대의 유대법-상법 전공 교수인 웨스트라이히 교수는 내게 환어음은 기원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용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어쨌든,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과 히스토리채널에서는 템플기사단원들이 (최초로) 성지순례자들에게 환어음을 발행해 주는 연기 장면을 버젓이 내보내고 있다. 실제로 서구 학계에서는 환어음이 13세기에 출현해서 1650년에 정립되었다고 본다. 기원전은 아닌 것 같다.

어음에는 환어음과 약속어음이 있다. 환어음은 수표와 유사하다. 즉, 나는 환어음을 만들면서 B가 이 환어음을 가지고 가면 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A에게 위탁한다. 그런데 수표와의 차이점은 ‘언제 이후에’ 그렇게 해 달라고 위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0년 5월 1일에 환어음을 만들면서 2010년 8월 1일 이후에 지급해 달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B는 8월 1일까지는 A에게 어음을 가지고 가서 돈을 받을 수 없다. 이 8월 1일을 만기라고 하는데 수표에는 만기라는 것이 없어서 언제든지 돈을 지급받을 수 있다. 어음에는 만기가 있어서 나는 실제로 3개월 동안 금융을 얻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즉, 환어음에는 수표에서와 같은 지급 기능 외에 신용 창출 기능이 있다. 기사단은 여행자의 여행기간 동안 해당 자금을 운용할 수 있다.

템플기사단을 최초의 ‘국제’금융기관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기사단은 유럽과 중동 전역에 걸쳐 단일한 지휘체계 아래 있는 수백개의 지부망을 보유했다. 지부들 사이에는 교신과 물자의 보급이 있었을 것이고 화폐와 어음도 그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둘째, 전 유럽에 조직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 화폐와 자산을 보유했을 것이다. 타지역 지부와의 교류에서 지역 화폐가 이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요즘의 외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가 가장 중요하다. 기사들은 성직자들이어서 모든 사람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입단할 때는 전 재산을 기사단에 내놓았다. 즉, 기사단과 기사들은 신용등급이 트리플A였다.

그 세 가지 특성은 현대의 글로벌 금융기관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과 똑같다. 한 가지 더 붙이자면, 기사단은 무장 수도사들이고 중세의 특수부대라고 불릴 만큼 무예에 뛰어났으므로 자체 경비역량까지 갖추었다. 현대의 금융기관들처럼 유사시 경찰과 군대의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돈을 빌려주고 원금과 이자를 받는 사업은 대단히 위험한 사업이다. 전적으로 남의 뜻과 건강과 행운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모든 채권자는 채무자의 건강과 사업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란다. 반대는? 사람들은 남으로부터 돈을 빌려 뭔가 급한 불을 끄거나 생활을 하거나 그 돈을 활용해서 돈을 벌거나 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갚고 싶지 않아한다. 독촉하면? 갑자기 안 좋은 사람이 된다. 왜 돈을 제때 갚지 않느냐고 화라도 내게 되면? 슬슬 적개심이 생긴다. 친구한테 돈을 빌려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는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으면 돈을 훔치지 말고 빌려서 갚지 말라는 서양의 속담(?)도 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만일 사망한다면? 얼마나 많은 채무자가 유족과 상속인을 열심히 찾아내서 돈을 갚을까? 한술 더 떠서 프랑스 왕 필리프4세는 자신의 채권자인 템플기사들을 다 죽여 버렸다. 돈을 갚기 싫어서 아예 채권자를 없애버린 것이다. 다른 채무자들은 표정 관리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냥이 아니고 온갖 날조된 죄목을 만들어 내 기사단에 뒤집어 씌웠다. 정당한 이유 없이 거액의 채무를 갚지 않은 왕으로 소문이 나면 정통성을 의심받게 되고 교회의 눈빛도 달라질 것이다. 그 경우 왕 자리가 위험해진다. 무엇보다도, 다른 곳에서 돈을 더 빌리기가 어렵다. 쉽게 도모할 일은 아니었다.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게 하고 교황의 협조도 받았다.

체포된 기사들은 모두 종교재판에 넘겨졌다. 그래서 필립왕은 기사단의 저주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기사단 해체와 박해 후 교황, 필립왕 둘 다 1년 이내에 사망했다. 필립왕의 세 아들인 루이 10세, 필립 5세, 샤를 4세도 모두 단명했다. 혼란과 함께 프랑스의 왕권은 약해졌고 거기서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이어졌다. 백년전쟁은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해서 시작된 전쟁이다. 결국 프랑스가 이기기는 했지만 116년 동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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