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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는 원래 예뻤을까

강종구 기자공개 2013-03-07 04:52:25

이 기사는 2013년 03월 07일 04:5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콩쥐와 신데렐라는 원님과 왕자님이 한 눈에 반할 정도의 절세가인이었을까. 원판 불변의 법칙을 인정한다고 해도,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하며 하녀처럼 살았던 두 소녀를 백옥같이 맑은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머리결, 길고도 고운 손가락의 소유자라고 상상하는 건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다.

두꺼비가 밑 빠진 독을 받쳐주고 참새가 벼를 쪼아주고 하늘나라 선녀가 새 옷을 내려주는 과정은 부엌데기 콩쥐를 원님의 그녀로 바꾸어주기 위해 꼭 필요한 기제다. 신데렐라가 왕자를 사랑의 포로로 만드는 데도 호박과 두 마리의 쥐와 두 마리의 도마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21세기 금융의 세계라면 굳이 무서운 성형수술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최고의 미녀로 거듭날 수 있다. 요술보자기라고 해도 될 만한 구조화금융의 화려한 포장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업황 침체로 생활고를 겪고 있는 현대상선은 보유 선박을 활용해 목돈을 만들기로 했다. 먼저 파나마에 서류상 회사(SPC)를 설립하고 선박 2척의 소유권을 넘긴다. 법률적으로는 매각이지만 용선료를 내고 선박을 그대로 사용하는 조건이다. 세일앤리스백(S&LB)과 같은 이치다.

같은 시간 한국에서는 장부상 만들어진 선박투자회사(동북아41호선박투자회사)가 주식을 발행하고 그 돈으로 파나마 SPC에 선박 구입대금을 대출해 준다. 선박투자회사가 발행한 주식은 현대자산운용이 조성한 사모펀드(현대오션스타 선박 사모특별자산투자신탁2호)에서 사준다.

이제 펀드 수익자만 모집하면 모든 과정이 끝날 것 같지만 아직 아니다. 파나마 SPC에 선박 구입대금을 지불하는 진짜 투자자를 구하기 전에 마지막 한번 더 포장이 이루어진다. 바로 유동화의 과정으로, 현대증권이 서류상 회사(오션에이블유한회사)를 만들어 펀드의 수익증권을 기초로 기업어음(ABCP)를 발행하고 지급보증을 선다. 이를 통해 최고 신용등급(A1)을 보유한 투자상품이 탄생하고 기관투자가나 일반투자자에게 비싼 값에 팔린다.

현대상선이 선박을 SPC에 매각하고, 현대증권이 ABCP를 발행해 투자자에게 판매하기까지 모든 과정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각각은 별개의 거래지만 별도로는 존재할 수 없는 거래들이다. ABCP 투자자는 이자(또는 할인료)를 받게 되는데 그 돈은 현대상선이 파나마 SPC에 내는 용선료의 일부다. 그러나 ABCP 투자자는 선박에 투자해 용선료를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현대상선을 믿고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선박이 폭풍을 만나 침몰해도, 현대상선이 부도를 내도 원리금을 회수할 수 있다고 믿는(현대상선이 지급보증을 섰기 때문에) 유가증권을 산 것이다.

엄청난 붐을 만들고 있는 ABCP는 마치 '무엇이든 싸 드립니다'라고 할 정도로 기초자산에 제한이 없다. 은행 고유의 상품인 정기예금이 자본시장으로 넘어와 ABCP로 둔갑하는 건 순간이다. 기업이 발행한 지분증권(주식)이 채무증권(ABCP)로 모습을 바꿔 유통된다. 마치 기초자산의 정체를 숨기려고 작정한 듯 수 차례에 걸쳐 포장이 이루어진다.

기초자산이 무엇이든 간에, 얼마나 많은 포장을 거쳤든지 간에 관계없이 공통점은 있다. 기초자산의 위험을 절연하고 신용등급을 높여 최고의 미인으로 만들기 위해 증권사(또는 은행이나 기업)가 지급보증이나 어음매입약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같은 ABCP의 규모가 늘어나면 날수록 모든 기초자산이 가진 위험은 증권사 한 곳으로 집결되고 다시 자본시장 전체로 퍼진다.

예기치 않은 일로 큰 사고라도 한번 터지면 은행의 위기가 증권사를 통해 자본시장으로 전염되고 자본시장의 위기가 은행의 뱅크 런을 유발한다. 정부는 은행과 자본시장의 동반 붕괴를 막기 위해 높은 격벽을 세우고 서로 넘지 못하도록 감시하지만 거미줄처럼 촘촘히 퍼진 ABCP의 인계철선에 의해 무력화된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그렇다. 전 세계를 전대미문의 위기로 이끈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완전히 닮은꼴이다. 이 화려한 요술주머니 앞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이 부르짖는 자본주의의 '원칙'도 힘을 잃는다. 은행이 어떤 기업에 대출을 하고 싶어도 동일인 여신 한도가 차서 할 수 없다면 그 회사의 채권을 유동화한 ABCP를 사면 된다. 눈치가 보인다면 회사채에 투자하는 특전금전신탁을 만들고 그 수익권을 유동화할 수도 있다. 이런 정황은 확실한 물증이 없을 뿐이지 실제로 특정 은행과 특정 재벌그룹 사이에서 여러 번 목격됐다.

법으로 금지돼 있는 자본금 가장납입도 눈 한번 질끈 감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최근 SK건설이 발행한 상환우선주 1000억 원이 ABCP로 유동화됐다. SK건설이 이 ABCP를 사들이면 우선주의 상환이 아니라 ABCP 투자가 된다. SK건설이 발행한 것이 상환우선주가 아니라 보통주였다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자본금 1000억 원을 늘리게 된다. 물론 국내 최고 그룹 중 하나인 SK가 그런 꼼수를 쓸 리는 없겠지만…

이 같은 ABCP는 2010년 이후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사모(私募)라는 거의 모든 정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분명히 유가증권이고 시장이나 투자자의 위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신용평가사는 신용등급을 공시하지 않았고, 금융당국은 증권신고서를 받지 않았다. 비밀주의와 정보비대칭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심을 방치한 결과, 이 '얼굴없는 미녀'는 급기야 전체 ABCP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만연해졌다. 감독당국 입장에서 보나, 금융회사나 투자자의 리스크관리 측면에서 보나 구멍도 그런 구멍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 요술주머니가 한국판 서브프라임 위기를 초래한다거나 새 대통령의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비웃는 일은 없을 것 같다. 2월부터 적용된 공시 강화로 은밀하게 가려졌던 ABCP들의 기초자산과 포장기술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당국은 새로 발행되는 ABCP에 대해서는 신용등급은 물론이고 기초자산과 신용위험을 공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로 인해 수 많은 시장의 눈들이 요술주머니의 정체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됐다.

신용등급 공시와 동시에 시행하려던 증권신고서 공시는 5월 이후로 미뤄졌다. 증권신고서 공시는 신용등급과 달리 사실상 '하지말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띄고 있어 앞으로 두 달 후 얼굴이 노출된 미녀들은 시장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

2월의 신용등급 공시와 5월의 증권신고서 공시 사이 3개월은, 의도된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정말이지 절묘한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원안대로 2월에 증권신고서까지 의무화했다면 지난 3년 자본시장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던 미녀들의 민낯이 콩쥐의 것인지 팥쥐의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고 자본시장 곳곳에 깔린 인계철선의 위치도 파악할 수 없었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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