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4년 01월 17일 08:4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관성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속성이다.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물체는 일부러 건드리지 않는 한 그대로 날아가려 한다.마음에도 관성이 존재한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인식은 물론 가치 판단에도 관성이 개입된다. 선입견이나 편견은 부정적 가치 판단이 관성을 띤 경우다. 반대로 긍정적 판단의 관성을 가지면 신뢰가 생긴다.
시장이 지금 품고있는 동부그룹에 대한 마음의 관성은 부정적인 쪽에 기울어 있다. '재무상태가 불안정한 그룹'이라는 선입견. 실제로 동부는 제철업과 반도체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지속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동부화재 등 금융 계열사들의 사정이 양호한 편이어서 그룹이 극단적 상황까지 몰리진 않고 있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굳이 본다면 동부는 계속기업으로서의 장기 성장전략을 구현하기 위해 자본을 타이트하게 운용하는, 기업가 정신이 돋보이는 그룹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익을 쌓아두기만 하고 투자에 소극적이라며 대통령이 직접 나서 총수들에게 투자를 독려하던 때가 엊그제다. 그런데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준다. 결과가 좋으면 신뢰가 생기고, 나쁘면 불신의 관성이 생긴다.
동부그룹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비금융 사업 부문에 총 3조 원 규모의 설비투자를 진행했는데, 이 중 80%에 달하는 2조5000억 원이 철강 사업에 집중됐다. 반면 이 기간 중 비금융 계열 전체가 창출한 상각전영업이익(EBITDA)는 2조8000억 원 수준에 그쳤다. 2조원이 넘는 금융비용, 수천억원의 운전자금이 소요된 것까지 감안하면 누적잉여현금흐름은 마이너스 2조5000억 원을 상회한다.
상황의 심각성은 동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최근 몇년 새 계열사간 분할 합병을 반복하고, 계열사 일부 지분을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매각한 것도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2013년에도 상황은 달라졌을 리 없다. 철강, 건설 등 주력사업이 속한 산업들의 경기는 여전히 바닥권을 맴돌았다. 오히려 향후 1,2년새 만기 도래하는 차입금이 과중하다보니 그룹으로선 비상 체제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해 11월 그룹이 계열사 자산 매각, 증자, 회장 사재 출연 등의 내용을 담은 3조 원 규모 자구계획을 시장에 공표한 것도 이같은 상황 인식에 따른 것이다.
관성이란 게 무섭다. 이 정도 했지만 시장의 선입견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것 같다. 선입견의 구체적 실체는 이런 게 아닌가 싶다. 그냥 믿어주기엔 과거의 못믿을 기억들의 잔상이 짙다는 것이랄까.
뭐 하나 시원하게 판게 없다. 동부익스프레스 지분 매각할 때도, 동부팜한농 지분 매각할 때도 그랬다. 가장 뼈아팠던 사례는 2008년 동부메탈 경영권 지분 매각을 놓고 프랑스 에라메트와 협상하다 무산된 경우다.
당시 에라메트는 1조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인수가로 베팅했었다. 당시 동부하이텍의 대규모 금융 차입금 상환 압박이 컸던 때로 기억하는데, 그룹은 동부메탈 경영권 지분을 파는 것을 내심 못마땅해 했던 것 같다. 그래선지 협상은 예정보다 길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계약서 체결 단계까지 다다랐는데, 돌연 글로벌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신청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당연히 에라메트도 동부메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그 때 단 몇 주 만이라도 서둘러 동부메탈 매각 계약을 체결했다면 어땠을까. 최종 성사까지 됐다면 동부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동부그룹이 강도높은 자구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다만 시장이 가지고 있는 불신의 관성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중요하다. 관성을 바꾸려면 임팩트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애지중지해오던 것을 과감히 떼내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뭐 그런거 말이다.
가령 동부익스프레스 지분 매각 거래를 살려낸다면 적지않은 임팩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거래는 한 사모투자펀드와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국민연금의 투자 의사 철회로 무산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투자자들이 동부익스프레스가 보유한 자산들을 탐내고 있어 그룹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거래가 무산 위기에 처한 진짜 이유는 진성매각을 거부하는 그룹의 부정적 관성이 빚어낸 비정상적 거래 구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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