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4년 11월 28일 16:3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내 한 대기업의 A 임원은 수년째 연말 인사시즌이 시작되면 사무실에 있는 잡다한 짐을 여러개의 박스에 담아 둔다. "임원은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곧바로 짐을 정리해서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나가야 할 것 같거나, 스스로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계속 자리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승진하고 싶지만, 만에 하나 퇴임 통보를 받으면 그나마 덜 실망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또다른 대기업의 B부장은 얼마전 끝내 임원을 달지 못하고 직급 정년에 걸려 회사를 나갔다. 부장을 몇년 하면서 연거푸 승진에서 물을 먹자, 내심 임원승진을 포기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역시나'로 끝났다.
기업들에게 11~12월은 올 한해를 잘 마무리하면서 내년 계획을 새로 설계하는 시기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연말과 연초에 걸쳐 실적 집계와 새해 전략, 이에 맞는 임직원 인사를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한다. 매년 비슷한 패턴이 이어져 왔지만 특히나 올해에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견기업들에 이르기까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한마디로 기댈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와 실적 부진의 여파로 이미 대규모 '감축', 내지는 '구조조정'이란 단어가 따라다닌지 오래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이미 임원을 30% 줄이고 젊은 부장을 임원으로 전진배치 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구조조정 한파의 서막을 알렸다. 국내 대기업들 대부분이 '바라만 보고 있는' 삼성그룹의 경우도 삼성전자의 실적부진 여파와 함께 대규모 임원 물갈이 및 조직개편 설이 수시로 떠돌고 있다. 삼성이 시장의 예상대로 대폭적인 임원 감축이나 긴축 경영을 선언하면 재계에 미칠 충격파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요즘 재계 임직원들은 무척이나 예민하다. 회사 안팎에서 들려 오는 인사 관련 얘기, 언론보도에 일희일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따로 임기가 없어 언제 나가라고 할지 모르는 임원들이나,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는 고참부장들은 말 그대로 피말리는 시기를 보낸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임원들의 경우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인사가 나기 2~3일 전에 미리 통보가 오는 경우가 많다"며 "인사팀 전화나 메일이 본인한테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긴장된 나날을 보내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올해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하지 못하면 회사를 떠나야 할 처지에 있는 한 대기업 임원은 "'고진감래(苦盡甘來)' 끝에 나름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했고, 이제는 '후생가외(後生可畏)'를 생각해야 할 때"라며 "이미 마음을 비우고 (퇴임이든, 승진이든)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돌아오는 인사는 실력이든, 어떤 라인에 있든, 운명이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 조만간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에 달하는 '새로운 별(임원)'이 생겨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만큼의 별들이 쓸쓸하게 짐을 챙겨 회사를 떠나야 한다. 승진하는 사람들에게는 축하인사가 넘쳐나겠지만 떠나는 사람들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퇴장하는게 일반적이다.
"사연은 산과 같고 할 말은 강과 같은데 나가라고 하니 떠나겠습니다. 가는 곳이 사막인들 어떻겠습니까". 2년전 겨울, 퇴임하는 한 임원이 보내 온 문자 메시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새로 임원의 반열에 오르거나 승진하는 사람들에게는 축하의 인사를, 조용히 물러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면서 내년을 기약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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