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5년 03월 20일 07:5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신용평가에서 운전자본 부담(매출채권+재고자산-매입채무)은 기업의 유동성 능력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로 쓰인다. 매출채권, 재고자산, 매입채무로 결정되는 운전자본은 영업현금흐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매출채권이 쌓이면 현금흐름이 꼬이고, 반대로 일종의 외상거래인 매입채무가 늘면 자금유출이 줄어 유동성 상황을 개선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신용평가에서도 매출채권과 매입채무의 조절 능력은 기업 신용도의 가감 요인으로 작용한다. 상거래 관계에서 강력한 협상력을 가진 대기업일수록 그 능력을 높이 평가 받는다.
실제로 결산기 거래기업에 자금결제를 늦춰 매입채무를 늘리는 인위적 방식으로 운전자본 부담을 줄이는 기업이 많았다. 자금 유출입상 부족 자금을 매입채무 조절로 해결하면 차입금의 증가를 막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신용위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유동성 관리 능력이지만 시장 논리로 따지면 일종의 '갑질'이다. 최근 경제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와 여론에 밀려 이 같은 관행이 점차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차입부담 등을 줄이기 위해 받을 돈(매출채권)은 서둘러 회수하고, 줘야 할 자금(매입채무)의 결제를 최대한 늦추는 곳이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자본시장에서 짠돌이로 정평난 롯데그룹 계열이다. 그룹 주축인 롯데쇼핑의 운전자본 변화를 보면 이 같은 현상을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다. 롯데쇼핑의 2014년말 별도 기준 운전자본은 -3323억원이다. 2003년 이후 10년 넘게 부(-)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운전자본이 아예 마이너스인 경우는 국내 대기업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매출채권과 재고자산 부담보다 거래처 등에 지급하지 않은 돈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롯데쇼핑이 지난해 말까지 거래 기업에 미지급한 매입채무는 무려 2조9150억원에 달한다. 2010년말 약 2조원에서 거의 1조 가까이 증가했다. 매출액이 3년간 정체 혹은 역성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증가 추세는 더 가파르다고 볼 수 있다.
최대 경쟁 기업 신세계·이마트와 비교하면 롯데쇼핑의 '갑질'을 더욱 뚜렷하게 체감할 수 있다. 신세계·이마트는 2000년대 중후반까지 만해도 롯데쇼핑만큼은 아니지만 매입채무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자금수지를 원활케 하기도 했다.
매출규모나 사업방식의 차이로 절대적 비교는 어렵지만 추세적으로 매입채무를 줄여온 것만은 분명하다. 2014년 현재 사실상 한몸인 신세계·이마트의 합산 매입채무 규모는 6455억원이다. 롯데쇼핑의 75% 수준인 매출규모의 차이를 감안해도 상당히 적은 수준.
과거 신세계의 운전자본은 2010년까지만 해도 롯데쇼핑과 마찬가지로 마이너스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매입채무 규모가 2006년 9058억원을 정점으로 조금씩 줄기 시작하면서 운전자본 부담도 함께 늘었다. 신세계·이마트의 2014년말 매출채권·재고자산을 반영한 운전자본은 2277억원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적어도 인위적으로 현금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거래상대방에 자금지출을 늦추거나 하는 일은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롯데쇼핑을 비롯한 롯데 계열은 국내 회사채 시장에서 역시 지나친 저금리 요구와 낮은 수수료 지급 등으로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어 왔다. 자본시장과 상거래 과정에서 보이고 있는 짠돌이 경영이 당장 금융비용이나 신용도 측면에서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장과 호흡하는 재무정책과 기업문화를 갖지 않는 이상 '유통계의 리딩 컴퍼니'라는 자부심은 견강부회식 자화자찬에 그칠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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