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0년 03월 25일 07:3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기업 승계는 종합 예술과 다름없다." 오랜 기간 기업 승계를 담당했던 한 회계사는 이렇게 말했다. 법률과 세금, 시장, 여론 등 어느 하나 이 예술작품의 재료가 아닌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 꼼꼼하게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준비가 됐을 때 치고 나갈 수 있는 실력(자금, 인력)도 필요하다.그런 면에서 화승그룹의 승계 작업은 정교하게 디자인된 '명품 시계'를 보는 듯하다. 시계는 부품 하나 하나가 모두 이유와 목적을 갖고 움직인다. 각개로 움직이는 듯 하지만 결국 톱니바퀴로 연결돼 시침과 분침을 움직인다.
화승그룹 또한 마찬가지다. 이유 없는 행동이 없었다. 현승훈 회장은 슬하에 장남 현지호 부회장과 차남 현석호 부회장을 두고 있다. 오랜 고민 끝에 장남에게는 '화승R&A(자동차 부품)'를, 차남에게는 '화승인더스트리(신발 ODM)'를 물려주기로 했다.
후계 구도가 명확해지자 2008년 기점으로 '예술'이 시작된다. 먼저 현지호 부사장과 화승R&A가 움직였다. 당시 현지호 부사장은 시간 외 매매 방식으로 지분 2.3%를 취득했다. 승계를 알리는 신호탄이 울리자 곧 그룹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승R&A 주주 계열사들은 수년 간에 걸쳐 보유 지분을 팔기 시작했다. 거래 상대방은 현지호 부사장이었다. 연이은 내부 거래 덕분에 지분율이 19.9%로 올라갔고, 곧 최대주주에 등극했다. 그렇게 화승R&A 대관식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화승인더스트리 승계 작업은 2009년 이뤄졌다. 당시 대주주는 그룹 계열사와 특수관계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해 주주배정 유상증자가 단행됐고, 약속이나 한 듯 대부분 청약 권리를 포기했다. 화승 측은 그 실권주를 이사회 결의를 통해 차남에게 몰아줬다. 유증 결정부터, 그룹사들의 고의 실권, 이사회를 통한 실권주 배정, 오너 3세의 등장까지 모든 것이 맞물려 진행됐고, 결국 현지호 부사장은 승계 왕관을 썼다.
화승그룹 승계는 8부 능선을 넘었다. 이제 현 회장이 갖고 있는 화승R&A와 화승인더스트리 개인 지분을 두 아들에 넘기면 마침표가 찍힌다. 해당 지분을 사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승계 재원 확보 방안까지 염두에 둔 걸까. 두 아들이 각자 출자한 중국과 베트남 무역 계열사들이 단연 눈에 띈다. 화승그룹이 다수의 해외 제조 계열사를 두고 있어 시너지 모색이 용이했다. 실제 장남 소유 중국 계열사는 설립 3년만에 매출이 22배 증가했다. 배당으로 투자금도 벌써 회수했다.
차남 소유 베트남 무역상사 역시 화물 운송과 신발 제조 사업 등으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 효과로 두 해 전에는 연 매출이 1000억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보유 지분을 팔던, 배당 수익을 얻던 향후 든든한 승계 재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해외 계열사의 승계 활용은 대기업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 1990년대부터 이미 글로벌 경영을 외친 화승그룹만의 맞춤형 전략으로 분석된다. 그 만큼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전략이었다. 화승그룹은 기업사에 남을 승계 예술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 그 계획의 끝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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