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0년 10월 30일 07:5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손에 피를 묻혀 왕이 된 인물은 필연적으로 승계에 불안감을 갖는다. 직접 겪은 골육상쟁의 비극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한 부정(父情)이다.철혈군주 이방원도 승계에 비극이 닥칠까 노심초사 했다. 반역을 우려해 셋째인 이도(세종대왕)를 즉위시키면서도 끝까지 폐위한 장남을 챙겼고 왕권강화에 부담이 될 수 있는 며느리 집안을 숙청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이 된 것을 온전히 이방원 덕이라고 평가하는 이는 없다. 부친의 후광이 뒷배는 됐겠지만 그보다는 세종대왕 스스로 가진 훌륭한 역량과 인품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가 세운 많은 업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산으로 남았고 애민(愛民)정신은 시대를 거스르는 리더의 자격이 됐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보면 이방원의 부정이 겹쳐진다. 회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던가. 왕좌를 차지하고 수년이 흐른 지금도 위협은 여전하고 여론은 싸늘하다.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 신유열씨를 감싸고 싶은 부정은 신유열씨의 그룹 입성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롯데그룹은 물론 일본 롯데그룹에서조차 그의 입사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한국 롯데그룹 주요 경영진도 어렴풋하게만 짐작했을 뿐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룹 공식입장은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다'이다.
신유열씨의 그룹 입성 과정을 취재하면서 접촉한 롯데측 인사들은 신 회장이 아들 신변에 대해 최대한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드러날 수 밖에 없고 또 드러나야만 하는 사실이지만 세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게 아닌가 싶다.
대그룹의 유일한 승계 후보자가 이토록 베일에 싸여있는 건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자그만치 국내 재계 5위권 대그룹의 후계자에 대해 대중은 물론 그룹 내부 임직원조차 아는 게 없다는 건 많은 의미를 담는다.
경영 후계자라고 해서 추앙받는 시대는 지났다. 스스로 험로를 헤쳐가면서 역량을 인정받는 절차가 필요하다. 경영수업을 이제 막 시작했지만 언젠가 전면에 서야 한다. 승계 후보자가 감춰지는 건 불확실성을 낳는다.
국적 및 병역문제나 경영역량에 대해 직접 풀어내며 스스로 리더의 자격을 증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생략된다면 아무리 신 회장이 뒷배가 된다고 해도 조직이나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세종대왕은 맏형인 이제(양녕대군)가 세자로 있던 시절부터 총명함을 널리 인정 받았다. 신하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경연장에서 반대로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였으니 존경할 수 밖에 없는 리더였다. 스스로 빛을 발하며 정치기반을 닦았다.
더이상 신 회장 뒤에 감춰진 미스터리한 인물이 아닌 수성(守成)의 경영자로서 자격을 갖춘 신유열씨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리고 스스로 증명할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게 진정한 부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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