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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5대 가족기업 스위스 로슈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1-03-02 08:00:09

이 기사는 2021년 03월 02일 08: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스위스는 제약산업의 글로벌 강자다. 경상남북도 정도 면적과 영국 런던과 비슷한 인구의 이 작은 나라에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가 두 개나 있다. 노바티스, 그리고 로슈(Hoffmann-La Roche)다.

로슈는 바젤의 명문가 출신 프리츠 호프만-라-로슈(1868~1920)가 1896년에 창업한 비타민 제조사로 출발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회사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다가 외부 투자 유치를 위해 1918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창업자는 곧 병사해서 자신의 회사가 세계적인 기업이 될 것을 모르고 떠났다. 로슈는 1934년에 비타민C를 대량 생산하는 최초의 회사가 되었다. 신종플루 포함 인플루엔자 치료제 타미플루(1999)가 히트상품이고 항암제 제조에서도 선두주자가 되었다.

2009년에 로슈는 자기보다 큰 미국의 제넨텍(Genentech)을 468억 달러에 인수해서 항암제 3종 생산라인을 추가하게 된다. 로슈의 제넨텍 인수는 1990년에 로슈가 경영난을 겪고 있던 제넨텍의 지분 60%를 취득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미국 진출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 딜은 대형 제약회사가 바이오텍 회사를 인수한 교과서로 남았다. 미국의 AHP가 제네틱스 지분 60%를 인수하는 딜이 뒤따랐다. 생화학과 생명공학의 결합이 미래라고 생각되던 시절이다.

그 후에도 로슈는 모두 20건이 넘는 M&A를 통해 성장해왔다. 로슈는 적대적 M&A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8년에 진단영상검사시약을 생산하는 스털링을 적대적으로 인수하려고 시도했다. 스털링은 바이엘 아스피린의 미국 제조사이기도 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는데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던 코닥이 백기사로 나섰기 때문이다. 코닥은 당시 가격으로 51억 달러에 스털링을 손에 넣었다.

로슈는 아직도 가족기업이다. 그러나 가족이 직접 경영하지는 않는다. 경영수업을 받던 창업자의 장남 엠마누엘은 36세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했고 장손도 이듬해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장남의 차남 루크 호프만이 대주주로서 1953~1996년 동안 사외이사를 지냈다. 1990년부터는 이사회 부의장이었다. 루크 호프만은 60권의 저서를 남긴 조류학자, 환경운동가였다. 시월혁명으로 러시아를 떠났던 라즈모프스키 대공의 차녀와 결혼한 사람이다.

지금은 역시 환경운동가인 그 아들 앙드레 호프만이 가족 대표, 로슈 이사회 부의장으로 있다. 후손들의 이름이 호프만인 이유는 창업자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옛 스위스에서는 혼인하면 배우자의 이름을 병기하는 관습이 있어 호프만-라-로슈가 되었는데 창업자 부부는 나중에 이혼했다. 즉, 회사 이름이 창업자의 이혼한 전 부인 이름이다.

창업자의 딸이 출가한 오에리(Oeri) 패밀리를 포함, 창업자 자손 15인이 보유한 가족지분은 9%, 의결권은 45%다. 2019년 말 현재 4세대 주주가 6인, 5세대 주주가 9인이다. 비교적 소수다. 스위스에서 3세대까지 가족경영이 이어지는 비율은 20%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가족들 중 한두 사람만 문제(지분 매각)를 일으켜도 가족경영은 쉽게 단절된다.

로슈는 5세대까지 지속되고 있는 예외다. 가족들은 주식을 처분하지 않을뿐 아니라 배당금으로 지분 희석을 막는다. 2020년 가족들이 수령한 배당금은 7억 달러를 넘었다. 스위스에서 직계 가족 간 상속에 상속세가 없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로슈 집안은 막대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웨덴 발렌베리 패밀리와 프랑스 푸조 패밀리를 생각나게 한다. 눈에 띄는 행동도 삼간다. 슈퍼카나 호화 요트와는 거리가 멀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가족도 있고 정형외과 의사도 있으며 재즈클럽을 운영하기도 한다.

회사의 가족기업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축적된 부(주식)를 다음 세대에 그대로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두가 생업에서 소득이 있고 굳이 회사 경영자 자리가 필요치 않으니 우리처럼 복잡한 계열분리를 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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