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2년 07월 20일 08: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997년 IMF 직후 국내에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회사) 창업 붐이 불었다. 팹리스에 벤처캐피털(VC) 자금도 몰렸다.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 팹리스들이 '스타 팹리스' 가능성을 주목받았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얘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투자 붐은 시들해졌고 한국은 이후 20년 가까이 '팹리스 불모지'다. 독립 팹리스 중 살아남은 건 텔레칩스와 어보브반도체 등 몇 곳에 불과하다.최근 팹리스에 눈길이 간 건 자본시장의 돈이 다시 몰리고 있어서다. VC뿐 아니라 사모투자펀드(PEF) 운용사들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너무 리스크가 크다"고 여겨졌던 투자처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 리벨리온, 딥엑스, 퓨리오사AI, 파두, 디에이아이오 등 팹리스들이 VC와 PEF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의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한국 산업을 지탱할 미래먹거리로 주목받고 있으니 팹리스에 돈이 몰리는 건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일 거다. 시제품 생산, 연구개발(R&D) 투자, 인재 확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기 때문에 자본이 없으면 성장이 불가능한데 민간 투자가 활발해지는 건 좋은 현상이다. '제2의 퀄컴' '제2의 엔비디아'가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까.
물론 희망은 늘 비관과 교차한다. 업계 일각에선 주요 스타트업들이 타깃으로 하는 AI 반도체 시장의 경우 자본과 인력을 가진 대기업들이 어느 순간 한 번에 장악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 대규모 자본을 유치한 몇몇 스타트업이 인재를 끌어들여 오랫동안 꿋꿋하게 성장 기반을 닦아온 중견·중소 팹리스의 인력난이 가속화하고 있단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는 워낙 영역이 넓어 대기업이 다 소화하지 못한다. 니치마켓을 뚫고 시장을 선점한다면 독립 팹리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또 정부가 20여 년 전 팹리스 산업 육성책을 쏟아부었는데도 실패한 건 국내 대기업에 종속돼 해외 진출에 실패한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장성을 높게 평가받는 기업 중엔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곳이 많아 과거와는 다를 거라는 기대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의 투자 붐이 투자자들이 돈을 벌고 나가는 현상으로만 그쳐선 안 된다는 점이다. 시리즈 A, B로 이어지며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지면 그 기업의 몸값은 뛰기 때문에 투자자는 차익을 얻지만 그렇게 끝나면 아무 의미가 없다.
민간 자본을 받은 곳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크고 주변 생태계가 동반 성장하는 그림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민간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탄탄한 생태계 조성의 기반이 되도록 정부 지원책과 대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마침 정부도 민간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 중이다. 창업 붐과 민간 자금, 정부 지원책이라는 삼박자가 만들어낼 결과가 2000년대와는 다른 모습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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