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9년 04월 17일 07:4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동걸 현 산업은행 회장이 취임(2017년 9월)한 직후 그와 동문수학하고 매우 가까운 금융계 고위 인사가 점심 식사 자리에서 대뜸 금호타이어 문제를 꺼낸 적이 있다. 당시는 금호타이어를 중국에 매각하는 것을 두고 박삼구 회장과 산업은행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해 논란이 있던 때였다. 그의 질문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너무 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평소 금호타이어 문제에 관심이 없었을 것으로 보였던 그가 갑작스럽게 이런 화두를 꺼내자 의도를 알지 못해 "글쎄요"라고 대답을 하긴 했으나, 생각해보니 친분이 두터운 이동걸씨가 산업은행 회장으로 오면서 그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가 여러 의견들을 듣고 여론 수렴을 하던 중이 아니었는가 판단이 들었다.비슷한 얘기는 우리은행에서도 흘러 나왔다. 금호타이어 매각 문제를 담당하던 임원은 사석에서 "산업은행이 예전과 다른 것 같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왜 그러냐고 되물으니 그는 "강경하다. 금호에 쉽게 양보를 안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동걸 회장이 부임하기 전까지 산업은행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밀월 관계'라 말해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은 금호 주변 관계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2015년 금호산업 매각이다. 사실상 입찰 방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언론 플레이, 재계 총수들을 찾아다니며 간접적으로 금호산업은 박삼구 회장의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채권은행의 채권 회수 극대화에 방해가 될만한 일들이 벌어졌으나 산업은행은 입을 닫았다. 금호산업 인수 주체였던 금호기업의 자금조달 능력은 숱한 미스터리를 남겼으나 이에 대한 반려 조치나 심사숙고가 보이지 않았다. 호반건설의 단독 응찰, 뒤이은 호반건설 입찰 자격 박탈, 박삼구 회장의 우선매수권 행사 허용, 금호기업에 우선매수권 양도 허용, 금호산업 매각 등 금호그룹 재건은 이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되돌아보면 당시 산업은행의 저지가 있었다면 금호산업의 자회사였던 아시아나항공의 불행은 지금처럼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금호아시아나그룹 역시 1조원에 가까운 자금을 들여 무리하게 그룹 재건에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왜 이동걸 회장이 이전 산업은행 회장들과 달리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 구조조정에 지금처럼 강경하게 대처하는 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외부에 정확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다. 이동걸 회장 개인의 원칙론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 이전 산업은행은 채무자이자 무리한 M&A로 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은 박삼구 회장에게 늘 끌려다니기만 했다. 박삼구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사내 게시판에 하루 전 "피를 토하는 심장으로 매각한다"고 했는데, 역으로 보면 이동걸 회장은 이 모든걸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도 궁금함을 사게 하고 있다.
이동걸 회장 주변 비슷한 철학을 공유하는 많은 인사들이 현재 문재인 정부 권력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이 상황을 설명하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이들의 '정책적 수용성', 예컨대 금산분리 원칙 완화에 반대한다는 등의 정책적 선택의 이슈가 발발할 경우 누구라 할 것 없이 '반대'에 한 표를 행사하는 '공감력'이 큰 무기인, 보이지 않는 세력이다. 비슷한 소신을 가졌다고 해서 해당 인물들이 따로 모여 집단화한다거나 세력화하지도 않는점은 이전 정부와 다른 점이다. 외부로 그 세력과 힘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 박삼구 회장과 같은 정치 9단인 재벌 오너도 그 힘에 대해 오판했을 정도다.
일례로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7년 9월 이동걸 회장이 산업은행 회장에 취임한 직후 '금호타이어 처리에 주목한다'라는 기고문을 국내 한 언론매체에 올렸다. 타이밍 치고는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내용 중 눈길을 끈 문장은 "그동안 박 회장(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보여 온 행태는 지역정서와 인맥을 동원한 정치게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금호타이어 처리는 새 정부의 구조조정 원칙과 책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새 정부에 인맥과 정치논리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지 재계는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김기식 위원장과 이동걸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 대선 캠프의 '캠프 라인' 출신이다. 재벌에 대한 비슷한 경제 철학을 갖고 있고 개혁 성향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던 인사들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비슷한 철학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참여연대, 노무현, 진보, 금융연구원, 금융개혁, 재벌개혁' 등 수많은 공통적인 공감대를 갖고 있어 어느 누가 어떤 정책을 집행하더라도 탄탄한 '정책적 공감성'이 형성돼 있는 세력이다.
김기식 위원장은 하루 전 전화통화에서 약 1년반이 지난 지금 아시아나항공 매각과 금호그룹 구조조정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금호는 그 당시 박삼구 회장에게 다시 주면서 구조조정이 지연됐다. 그러면서 내재적 문제가 최근 다시 불거진 것이다. 구조조정 기업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무리하게 그룹을 재건했고 그 과정에서 그룹 전체가 부실화됐고 악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기업 구조조정의 원칙에 대해 예전 보고를 한 적이 있다. 문 대통령도 의원 시절 산은 주도의 안좋은 구조조정 사례를 여러차례 봐왔고 지금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전과 같은 방식이 아닌 기업의 지속 가능성에 중심을 둔 구조조정 원칙을 펴나가고 있는 게 맞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이동걸·김기식·김상조, 그리고 이 외 잘 알려지지 않았을 일부 인물들은 깨질 것 같지 않던 재계·법조계·정치권 내에 있는 '박삼구 카르텔'을 깨뜨리고 있다. 최근 금호아시아나그룹 문제와 관련 고위 공직자들에게까지 수많은 전화가 와 '박삼구 구하기'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상황이 알려졌던 것만 봐도 카르텔의 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도도 실패할 정도로 이들의 신념은 확고했고 맷집도 셌다.
정치적으로 보면 호남 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과 호남 재계 맹주인 박삼구 회장은 과거 보수정권 10년 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그룹을 유지해 왔으나 정작 그룹 재건에 성공한 후 나타난, 호남 지역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진보 정권 아래서 모든 것을 잃게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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