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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QIB를 탱자로 만들었나

강종구 부장공개 2012-04-03 11:34:59

이 기사는 2012년 04월 03일 11:3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기업을 장기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려면 자본시장이 크고 깊어야 한다. 특히 경영권에 위협을 받지 않고 저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공모 회사채 시장이 없다면 금융강국은 한낱 허망한 꿈일 뿐이고 경제 발전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미국에 세계를 호령하는 다국적 기업이 밀집돼 있는 것도, 영국이 숱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세계 최강의 금융경쟁력을 자랑하는 것도, 말레이시아가 아시아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중국이 자국 채권시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우려고 기를 쓰는 것도 이와 무관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 공모 회사채 시장의 벽은 높아도 너무 높다. 기껏해야 600~700개 기업이 이 시장에 들어와 있는 전부다. 금융회사와 공기업을 제외하면 순수한 민간기업은 그 중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대기업집단의 계열사 이거나 AA등급 이상의 높은 신용을 갖춘 곳은 4~5%의 낮은 금리에 얼마든지 돈을 구할 수 있는 풍요의 땅이지만, 비우량기업은 10% 이상의 고금리로도 투자자를 찾기 어려운 설움의 땅이다. 대한민국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웬만한 큰 기업들조차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다.

안철수씨가 모 방송에서 얘기하기로는 수십년간 자력으로 매출액 1조원 이상의 성공을 이룬 기업이 NHN과 웅진그룹 두 곳 뿐이라고 한다. 여러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초우량 대기업만의 리그가 된 회사채 시장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자금을 안정적으로 구할 곳이 없어 아깝게 사라진 제2의 삼성, 제2의 현대차가 얼마나 많았던가. 벤처기업은 정부가 지원하는 벤처캐피탈이 있고, 대기업은 은행과 금융시장이 알아서 모시지만 그 사이에 있는 중견·중소기업을 위한 금융시장은 한국에 없다. 실로 미래 국가경쟁력과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적격기관투자가(QIB)제도라는 것이 있다. 공모채 시장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없는 기업들이 자기 신용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제2의 회사채 시장을 만들자고 고안됐다. 2009년말 금융위원회가 대통령업무보고에 넣으며 공론화된 이후 2년 반 만인 다음 달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그런데 최근 모습을 드러낸 QIB제도는 처음 기획될 당시와는 전혀 딴판이다. 전문가들이 2년여를 고민해 제시했던 취지와 밑그림은 온데 간데 없고 어울리지 않는 색들로 덧칠한, 그야말로 제도를 위한 제도가 되어 버렸다.

정작 자본시장 진입이 가능한 대부분 기업들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들 기업에 '적격'인 전문 투자자들(이를테면 저축은행 단위농협, 단위금고, 단위신협, 대기업 등)도 배제됐다.

신용등급 A 이상이 아니면 절대 투자를 하지 않는 은행 보험 연기금 펀드 등으로 QIB를 구성했다. 그런데 이 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기업들은 A등급은 고사하고 BBB등급도 받기 어려운 곳들로 제한됐다.

펀드도 QIB이니, 펀드에 가입해 간접적으로 투자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이 역시 헛일이다. 금융당국이 이 시장을 순전히 '사모'시장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장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어야 할 기업과 투자자가 참여할 방법을 완전히 막아 놓은 꼴이다.

중소기업들이 공시가 무섭고 귀찮아 채권 발행을 꺼리는 것인가. 은행을 수십번 들락거리고 130%이상 담보를 세워야 간신히 돈을 빌릴 수 있는 곳들이 절차가 복잡해 채권시장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인가. 기업은 좀 더 싼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투자자는 조금 위험을 더 부담하더라도 높은 금리를 향유할 수 있는 곳을 만들자는 것 아니었나. 공시부담 줄인다고 투자자 수가 좀 적다고 사모로 규정해 놓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만들어 놓은 제도를 보고 금융투자회사나 자산운용사의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 '벤처기업용 자본시장'으로 밖에는 활용할 길이 없다고 한다. 웬만한 대기업에도 투자하지 않는 은행 연기금들을 모아 벤처기업에 투자토록 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이들이 직접 벤처기업에 투자하면 벤처캐피탈 회사들은 무얼 먹고 살라는 말인가.

금융당국으로 넘어가기 전 이 제도의 골격은 사실상 만들어 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대로 건물만 올리면 될 일이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려면 통과해야 할 그 바늘구멍을 좀 더 넓힐 수 있었다. 누가 그 엄청난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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