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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신용평가, 변화는 도둑처럼 온다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공개 2012-07-30 07:09:50

[편집자주]

이 기사는 자본시장 전문 미디어 머니투데이 더벨이 만든 자본시장 전문매거진 thebell insight(제8호):1st half of 2012, Korea capital markets league table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2012년 07월 30일 07:0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한국의 신용평가 선진화 열쇠는 당국이 쥐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신용평가의 기초 상식인 독자신용등급을 도입하는 것조차 도리질하는 이들을 보면서 '변화는 도둑처럼 온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회사채시장 전반에 건강한 생명력이 감돌고 정보흐름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도둑처럼 찾아오는 변화,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신용평가는 회사채시장의 기본적 프로토콜이다. 당연히 회사채시장과 신용평가는 변화도 함께 겪는다. 회사채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상이 크게 높아지면서 제도개선의 필요성이 커졌고, 이는 곧바로 신용평가 선진화 논의로 이어졌다.

물론 회사채시장 제도개선이나 신용평가 선진화나 모두 당초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만큼 현실의 벽이 높은 것이지만, 어쨌든 변화는 시작되었고 작으나마 분명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더욱이 이런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관이 주도하는 신용평가 선진화 논의

회사채시장 제도개선과 신용평가 선진화 모두 금융정책당국이 2012년 정책과제로 발표한 것들이다. 그런데 회사채시장 제도개선은 어쨌든 업계의 자율을 앞세워 추진되고 있는 반면, 신용평가 선진화는 당국이 직접 키를 쥐는 양상이다.

자본시장법 개정 지연으로 금융투자협회가 신용평가 이슈를 주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신용평가사와 당국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우리 평가사는 2001년 채권시가평가 도입으로 독자적 성장기반이 조성된 이후에도 여전히 당국에 대한 의존성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평가과정에 당국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지만, 민감한 사안에 평가사가 매번 뒷북 대응하는 이유가 당국의 입장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시장의 시각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당국은 이번에 ‘독자신용등급 도입'과 함께 ‘신용평가사 공시의무 확대', ‘신용평가사 내부통제기준 법규화' 등을 통해 신용평가사에 대한 감독기능을 보다 체계화할 계획이다. 특히 내부통제기준 법규화는 단순한 윤리강령(code of conduct) 정도가 아니라 신용평가의 핵심과정까지 살펴보는 아주 깊숙한 수준이다. 신용평가의 본질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접근이지만 흥미롭게도 우리 평가사와 시장은 이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신용평가의 보호자는 누구?

채권왕 Bill Gross의 신용평가에 대한 언급을 비교해 보자. 모두 평가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여론의 방향을 바꾼 일갈이다.

 "엔론사태를 계기로 평가사에 대한 규제 움직임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평가사의 책임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를 규제로 푸는 것은 더 나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민간 평가사에 의한 free speech와 free press는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2002.4)

 "이번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은 향후 몇 년간 영향을 줄 큰 사건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미국의 경제적 부흥으로 이끌, 작지만 긍정적인 신호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2011.8)

어느 것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용평가가 글로벌 신용평가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우리 평가사에게는 Bill Gross로 상징되는 ‘보호자(Patron)로서의 시장'이 없다. 채권시가평가가 도입되고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평가사와 회사채시장은 동반자로서의 유대감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우리 회사채시장은 평가사가 여전히 서먹하고, 우리 평가사에게는 당국의 품이 여전히 더 따뜻하다.

물론 회사채시장과 평가사 모두 서로에게 다가서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다. ‘신용평가사 서비스에 대한 회사채시장 전문가 설문'은 벌써 15회 차(7.5년)에 이르렀고, 평가사의 세미나(비공개 포함)도 매년 10회 이상 열린다. 밋밋하고 지루했던 평가사의 Special report는 갈수록 참여적이고 논쟁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평가사들은 마켓리더들과 더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옴부즈맨 회의까지 도입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서비스인 평가등급과 보고서는 좀처럼 뚜렷한 변화가 없다. 왜 그럴까? 파트너의 무능과 게으름을 비난하고 체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파트너의 속사정을 살펴보고 함께 대안을 찾는다면 훨씬 현명한 접근이 될 것이다.

◇우리 신용평가 서비스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 평가사의 평가서비스를 글로벌 평가사와 비교해보면 당장 보고서부터가 전혀 딴판이다. 우리 평가사의 보고서는 매우 친절하다. 분량도 두툼하고 설명과 도표도 상세하고 풍부하다. 기업의 개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반면 글로벌 평가사의 보고서는 논리적이다. 평가논리가 뚜렷하고 중간단계에서 부분별 평가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슈의 전개에 따른 평가의견의 방향성을 가늠하기 쉽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한다. 하나는 우리나라 평가사의 보고서는 기초 정보제공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부실한 기업 공시와 설명회로 인한 기초적 정보갈증을 평가보고서가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화와 토론이 부족하고 곧잘 논리적 분석을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문화 때문이다. 결국 사실관계를 나열하고 중간단계 없이 바로 결론으로 비약하는 방식으로 갈등의 소지를 피해가는 것이다.

여기서 또 몇 가지 차이가 파생한다. M&A 등 대형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 글로벌 평가사는 곧바로 신용등급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하여 발표한다. 반면 우리 평가사는 입장 표현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뒤늦게 입장을 밝히더라도 두루뭉술하기 일쑤다.

또 등급전망이나 등급감시에 특이 소견(특히 Negative)이 있을 때도 글로벌 평가사들은 정해진 시점에 대부분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는 반면, 우리 평가사들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시간을 흘려 보낸다.

좋게 보자면 발행기업을 배려하는 것이지만 달리 보자면 대가 약한 것이다. 이게 모두 발행기업의 평가수수료에 의존하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라고 보는가? 아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왜 평가사만 신용분석 보고서를 내야 하는가. 사실 우리 평가사의 옹색함은 나 홀로 신용분석에서 비롯된다. 글로벌 평가사는 상당한 수준의 신용분석 보고서를 발표하는 글로벌 증권사와 함께한다. 그래서 발행기업에게 좀처럼 밀리지 않는다.

회사채 발행절차 정상화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투자의사 결정에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지만 만약 이 시간적 여유가 투자자를 위한 정보생산에 쓰이게 되고, 그것이 서비스 차별화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많은 양질의 보고서가 쏟아져 나오면서 기업정보 제공 확대와 논리의 향연으로 이어진다. 그때서야 비로소 평가사 보고서는 고립에서 풀려나 제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글로벌 평가사는 이러한 정보와 논리의 향연을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뻔한 상황논리와 소심한 등급 운용으로는 시장선도자가 될 수 없다. 평소에도 꾸준히 의제설정에 신경을 쓰지만, 한번씩 평가논리를 바꾸는 대형 이벤트를 벌인다. 당연히 시대적 과제를 담은 거대 담론이 내걸리고, 인상적인 등급 변경들이 그 뒤를 따른다.

◇도둑처럼 찾아올 변화

이헌재 전 부총리의 자서전에 ‘도둑처럼 찾아온 개혁'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게 개혁인지도 모르지만 한참 지나고 보면 뭔가 바뀌어 있다. 이런 개혁이 진짜라는 설명이다.

어쩌면 신용평가의 진정한 변화는 이렇게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글로벌 신용평가의 기초 상식인 독자신용등급을 도입하는 것조차 도리질하는 이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회사채시장 전반에 건강한 생명력이 감돌고 정보흐름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도둑처럼 찾아오는 변화,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윤영환/신한금융투자/Credit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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