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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과 투명성 [thebell desk]

이승호 기자공개 2014-02-24 08:47:47

이 기사는 2014년 02월 20일 13:1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더 이상 영화산업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투명하지 않고 불공정한 영화시장에 투자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다"

2007년, 영화 투자의 원조격인 A창투사 대표의 말이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당시 한국영화시장은 신기록의 연속이었다. 2003년 개봉된 실미도가 1108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영화 1000만시대' 개막을 알린데 이어 2004년과 2005년에 '태극기 휘날리며'(1174만 명)와 '왕의 남자'(1230만 명)가 1000만 돌파에 성공했다. 2006년에는 '괴물'이 1301만 명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전성기를 알렸다. 2004년 이후 매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 1편 이상 개봉되던 시기였다.

문화콘텐츠 전문 벤처캐피탈들이 한국영화 전성기에 왜 영화투자시장에서 떠나겠다는 선언을 했을까. 답은 '불투명'과 '불공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영화 1000만 시대'에 고무된 벤처캐피탈들은 지속적으로 영화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한국영화연감에 따르면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165억 원(2개 조합)과 735억 원(8개 조합)이던 영상전문투자조합 결성규모는 2001년 들어 1214억 원(13개 조합)으로 대폭 늘어났다. 2005년에도 1155억 원(7개 조합)이 신규로 결성됐다.

하지만 2006년 이후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2006년 영상전문투자조합 결성규모가 467억원(4개 조합)으로 반토막 난데 이어 2007년에는 단 1원도 신규 조성되지 못했다. 이유는 수익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화시장 투자를 위해 조성된 대부분의 펀드들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다. 당연히 돈줄이 끊겨버렸다.

A 창투사 대표는 당시 인터뷰를 통해 "총 40여 편의 영화에 투자해 흥행 성공률이 60%에 달했지만 수익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며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사실상 손실을 봤다"고 영화산업 투자에서 손을 뗀 이유를 설명했다.

벤처캐피탈업계의 맏형격인 B사도 사정은 마찬가지. B사 관계자도 당시 인터뷰에서 "2004년부터 100억 원 규모의 펀드 2개를 조성해 투자해왔는데 수익률은 마이너스 20% 수준"이라며 "앞으로 영화투자 관련 신규 펀드는 조성하지 않을 계획"이라 못 박았다.

당시 '화려한 휴가', '웰컴투 동막골', '괴물', '타짜' 등 흥행에 성공한 대박영화에 투자했던 대성창업투자(당시 바이넥스트창업투자)와 CJ창업투자 등도 겨우 손익분기점 수준에 그쳤다.

영화투자 수익률이 낮은 가장 큰 이유가 투자회사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국내 영화시장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었다. 국내 영화시장에서 입장수입의 절반은 극장 몫이고 10%는 배급사가 수수료로 가지고 간다. 나머지 40% 수입 중 투자원금을 제외하고 이익이 남는 경우 투자회사와 제작사가 6대 4의 비율로 수익을 배분한다. 흥행에 실패하면 모든 손실은 투자회사가 떠안게 된다.

영화투자전문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재무적 투자자는 돈을 넣고도 수익배분에서 후순위로 밀릴 뿐 아니라 영화산업의 병폐중 하나인 불투명한 회계 등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어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한국벤처투자(모태펀드)가 영화산업군에 대한 자금공급원으로 나선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당시 벤처캐피탈 업계에는 '영화투자 기피현상'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모태펀드는 자금 공급과 함께 영화산업에 대한 혁신을 유도했다. 투명하지 않게 집계되던 극장관객수 집계 시스템을 수술하고 회계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당시 영화제작사는 관객수 집계를 위해 입회인을 고용해 각 극장별로 파견했다. 이들은 극장 앞에 자리 잡고 입장 관객수를 수기로 집계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극장관객수는 신뢰도가 낮았고, 투자자의 투자금 대비 수익금 측정도 불명확했다. 영화진흥위원회도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했고, 통합전산망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현재 국내에 상영되는 모든 영화들은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시스템을 통해 관객수, 매출액, 좌석점유율 등이 집계된다.

투자금 관리 차원에서도 투명성 요구가 강화됐다. 당시 일부 제작사들은 투자금을 해당 프로젝트 제작이 아닌 다른 프로젝트 손실을 메우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카드돌려막기와 같이 투자금 돌려막기가 흔하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결국 벤처캐피탈은 투자금 관리를 위해 영화제작사에 별도 통장 개설을 요구했다. 제작사가 정하는 프로젝트별로 통장을 개설하고 해당 투자금의 입출금을 관리하는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모태펀드는 투자금 관리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2012년말부터 문화콘텐츠펀드로부터 투자를 받는 경우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투자금을 관리하도록 규정을 신설했다.

자의반 타의반 투명성 확보에 성공한 영화산업은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 수익을 창출하는 '투자할만한' 산업군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문화콘텐츠펀드 사상 최초로 펀드 수익금의 중간배당도 가능해졌다. 주인공은 '캐피탈원'이다. '캐피탈원 한국영화르네상스투자조합'은 지난해 말 기준 82억 원의 수익을 거뒀고, 이 중 50억 원을 중간 배당할 예정이다. 이 조합은 2011년 100억 원 규모로 결성됐고, '7번방의 선물', '몽타주', '신세계', '감시자들', '숨바꼭질', '밤의여왕', '변호인', '남자가 사랑할 때' 등 최근 흥행에 성공한 대부분의 영화에 투자했다.

2009년 1145만 명을 동원한 '해운대' 이후 주춤하던 한국 영화시장은 재도약기로 접어들고 있다. 1년에 1편이 나오기 어려운 '1000만 관객' 영화가 매년 2편씩 개봉되고 있다. 2012년에 '도둑들'(1298만 명)과 '광해, 왕이 된 남자'(1231만 명)가 1000만 명을 뛰어넘은 데 이어 2013년에도 '7번방의 선물'(1281만 명)과 '변호인'(1136만 명)이 '1000만 돌파'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환경이 급변하자 최근 들어 한국투자파트너스와 키움인베스트먼트 등 정통 벤처캐피탈들까지도 문화·콘텐츠 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반가운 일이다.

영화산업계는 양질의 기관투자가들이 문화·콘텐츠 투자에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지금이 기회이자 위기임을 알아야 한다. 2007년 영화투자시장을 떠나며 벤처캐피탈이 제기한 문제점들이 얼마나 해소됐는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 아직도 관례처럼 남아 있는 이면계약과 특급 배우들의 과도한 개런티 요구 등도 개선돼야 할 사안이다. 경영 투명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2007년 교훈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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