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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신용등급 도입 이후 [Credit View]

윤영환 서울신용평가 평가사업본부장공개 2015-01-02 10:32:43

[편집자주]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단지 신용투자의 잣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기업의 펀더멘털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늘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더벨을 통해 마치 지각 아래 거대한 멘틀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다양한 크레딧 전문가의 뛰어난 직관을 감상해 보십시요.

이 기사는 2014년 12월 31일 11:0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신용평가는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계속 신용환경이 변하면서 리스크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에는 실패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구조정립에 따른 요구로 평가 논리와 방식의 대대적인 혁신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그만한 준비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 실천으로 이끌어낼 계기와 동력도 필요하다. 그러면 위기는 도약의 기회가 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기존 모순에 갇혀버리면 혁신은 요식행위에 그치고 머지않아 더 큰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다시 새로운 변화의 맹아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반전에 반전, 다시 반전이 이어지는 것이 위기를 읽는 묘미다.

◇독자신용등급의 연착륙

신용평가도 다르지 않다. 최근 진행중인 독자신용등급 도입도 그런 진화의 한 부분이다.

사실 독자신용등급 자체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글로벌 평가사를 통해 우리 평가사는 물론 주요 기업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개념이다. 그런데도 우리 신용평가 시장은 이를 스스로 도입하지 못했다. 결국 2011년 당국이 나섰지만 재계와의 인식차이로 도입이 차일 피일 미뤄지다가 2015년 전면 도입을 앞두고 있다.

독자신용등급의 도입이 어지러운 행보를 보인 것은 단지 그 절박함이 상황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자신감에 묻혔다가, 동양 사태와 뒤이은 신용평가사 이슈에 뜨겁게 반응하여 다시 진도를 나갔다.

앞으로 독자신용등급이 시행되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큰 혼란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가사들이 대비할 충분한 여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신용평가의 틀이 크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신용등급 도입은 신용평가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용등급 결정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보다 친절한 서비스일 뿐이다. 신용평가 과정을 모델과 내재적 조정요인, 그리고 유사시 지원가능성 등으로 구분하여 제시함으로써 신용등급의 결정과정을 객관화하고 안정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새롭게 제시되는 방법론보다는 혹시라도 기존의 신용등급 질서가 바뀔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크다. 평가사들이 논리적, 객관적으로 평가를 해왔다지만, ‘모델-독자-최종등급'의 체계로 넘어가면서 아무래도 등급질서에 영향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형식은 곧잘 본질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평가사는 그 정도의 절차와 형식 변경이 신용등급 질서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설령 등급에 변화가 있더라도 그것은 독자신용등급 도입 때문이 아니라 개별적인 신용도 변화에 따른 경상적인 등급변경이라는 입장이다. 충분히 합리적인 설명이다.

◇금융회사에 대한 정책적 지원가능성 퇴조

그러나 새로운 체계를 도입하면서 그저 순조롭게 이행해야 하고, 기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생각하면 응당 무엇인가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독자신용등급 도입의 의미가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역시 ‘유사시 지원가능성' 요소의 재정립이다. 유사시 지원가능성도 신용도 판단에 있어 분명히 중요한 요소다. 그런 점에서 이를 반영하기 전 단계인 독자신용등급이 진정한 신용등급이라는 일각의 논지는 설득력이 약하다.

문제는 이 ‘유사시 지원가능성'이 곧잘 신용도 판단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략 두 가지 과정이 작용한다. 하나는 구조적으로 정책적 지원이 크게 작용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의 한계로 펀더멘털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 과도하게 모기업의 후광에 의존하는 경우다. 물론 이 두 가지는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유사시 지원가능성, 나아가 정책적 지원가능성 이슈는 평가요소로서의 비중이 비금융 일반회사에서 제일 작고, 금융회사와 공기업으로 넘어가며 급격히 확대된다.

비금융 일반기업은 지원가능성 요소가 상대적으로 작고, 설명논리가 뚜렷하며, 변동성도 작아서 독자신용등급 체계로의 이행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공기업은 워낙 그 비중이 높아 절대적 평가요소로 작용하는 경우다. 물론 공기업도 선진국의 사례를 감안하면 언젠가는 정책적 지원가능성 요소가 크게 낮아지겠지만 아직은 거론할 단계가 아니다. 실제로 독자신용등급 적용이 상당기간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반면 금융회사 평가에서 정책적 지원가능성은 다루기 쉽지 않은 이슈다. 무엇보다 정책적 지원이 만능 열쇠로 작용했던 역사적 경험들이 정교한 펀더멘털 분석을 덧없게 하고, 최근의 구조변화에 눈 감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금융회사에 대한 정책적 지원가능성의 퇴조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경제가 선진화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운용기조가 ‘고성장-저효율-고강도 개입'에서 ‘저성장-고효율-자율 중시'로 이행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더하여, 대형 금융위기 이후의 성찰과 시스템 보완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점차 현실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적 지원가능성 요소의 약화를 신용위험 평가에 어떻게 반영하느냐는 이제 당면과제가 되었다. 많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뒤로 미룰 상황도 아니다. 최근의 금융회사 평가실패도 과거라면 충분히 설득력 있었을 규제감독의 역할과 정책적 지원에 대한 굳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금융회사의 대표격인 은행(또는 은행지주회사)의 신용등급을 살펴보자. 펀더멘털 수준과는 무관하게 신용등급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유사시 정책적 지원가능성이 펀더멘털의 차이를 압도하는 것이다.

은행에 대한 정책적 지원가능성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엷어진 개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상당수 은행들이 외화유동성 확보와 자본확충 과정에서 정책적 지원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외화유동성 이슈의 핵심고리인 대기업 유전스(Usance;원자재 수입 관련 무역금융)와 관련한 리스크가 축소되고, 위기 시 자본으로 강제 전환되는 코코본드 발행잔액이 의미 있는 수준에 이른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은행의 신용등급이 수렴하는 가장 큰 요인인 유사시 정책적 지원 가능성(당국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점차 약화되고 있으며 머지않아 희미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적 고려의 후순위인 제2금융권 회사들의 신용도조차 펀더멘털 분석보다는 유사시 지원가능성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 시장의 현실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나?

◇시장의 논쟁과 신용평가

뿐만 아니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회사에 대한 글로벌 평가사들의 평가방법론이 크게 변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재무요인에 대한 평가기준과 가중치가 부쩍 강화되는 가운데, 특히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평가의 비중과 기준 강화는 놀라울 정도다. 이에 대한 우리의 성찰은 충분한가?

글로벌 평가사들은 평가방법론을 공격적으로 바꾸고 관련 회사들의 신용등급을 일괄 조정하거나 뒤집는 파격적인 접근을 서슴지 않는다. 격렬한 논쟁도 불사하는 쟁쟁한 기관투자가들과 의욕 넘치는 신참 평가사들 사이에서 신용이슈의 주도권을 지켜내지 못하면 시장지위 또한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평가사들은 논쟁적 접근보다는 점진적이고 부드러운 적응적 조정을 선호한다. 제반 신용이슈에 대한 학습과 사유를 소수의 평가사에 오롯이 맡기고 있는 우리 구조의 당연한 귀결이다.

2012년 회사채 발행절차 정상화로 투자분석 기간이 크게 늘었지만 기대했던 논쟁이나 투자정보의 확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여러 차례 제도를 정비했어도 회사채시장의 실질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대형 위기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소한 위기를 허용하는 것이듯, 회사채시장을 건강하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조금은 소란스럽더라도 신용이슈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가 활성화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독자신용등급 도입으로 시장은 평가사의 선반에 올려져 있던 수많은 논쟁거리를 공유하게 된다. 불쏘시개가 마당에 쫙 깔리는 것이다. 과연 이를 계기로 우리 회사채시장에도 신용이슈와 평가논리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등장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기대를 가져본다.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면 충분하다. 세 가지도 필요 없다." - E.M. Forster, ‘Two cheers for democracy' -


윤영환 서울신용평가 평가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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