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전체기사

[한국의 재벌3세]'CJ' 창업 1세대…험난한 길 택한 삼성家 장손[이재현 CJ그룹 회장]'문화사업' 도전, 친인척 영역 피하며 재계 14위로 키워

이경주 기자/ 이윤재 기자공개 2015-01-29 08:23:53

이 기사는 2015년 01월 22일 10:2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고모님 하시는 사업에 손댈 수 없다" 1990년대 중반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의 한 참모가 이재현 회장(55)에게 대형마트사업을 제안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당시 상황은 이재현 회장(사진 맨 위)이 절박하게 신사업을 구상하던 시기였다. 그는 1997년 우여곡절 끝에 제일제당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 독립해 내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끊임없는 위기감 속에 살아야 했다. 삼성그룹이 제일제당 주식을 다시 사들이는 등 불안감을 느낄만한 이슈가 적지 않았던 게 원인. 그는 어떻게든 사세를 키워 경영권을 지키고자 했다.

그 와중에 참모로부터 마트사업을 제안 받았다. 당시 대형마트 사업은 블루오션이었다. 게다가 식품 1위기업인 제일제당과 시너지가 기대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마트사업을 시작한 고모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과감히 거절했다. 이 회장이 마트사업을 택했다면 지금의 대형마트 경쟁구도는 3파전이 아닌 4파전이 됐을 것이다. 대신 이 회장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 '문화사업'에 도전해 CJ그룹을 재계 14위로 키워냈다. 그는 삼성가(家) 3세를 대표하는 장손이지만 창업자와 다름 없는 좁은 길을 걸었다.

◇창업3세 아닌 1세로 기억받길 원하는 삼성가(家) 장손

이 회장은 1960년 장충동에서 삼성가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삼성 이병철 선대 회장의 맏아들이면서도 그룹 후계에서 밀려난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84)이 아버지,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의 딸인 손복남 CJ 고문(82)이 어머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 회장의 형제로는 위로 누나인 이미경(57) CJ 부회장이 있고, 아래로 동생인 이재환(53) 재산커뮤니케이션 대표가 있다. 대학시절 한 연말모임에서 우연히 김희재(54) 여사를 알게 돼 연애 끝에 결혼, 딸 경후(30)씨와 아들 선호(25)씨를 뒀다. 경후 씨는 2008년 외국계 은행원과 결혼식을 올렸고 슬하에 1남(5세)을 두고 있다. 재벌가 부녀가 대를 이어 다른 재벌 등이 아닌 비교적 평범한 가정의 배우자를 만나 연애결혼을 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려대 법대에 진학한 이 회장은 법대 4학년 때인 1983년 삼성이 아닌 씨티은행에 입사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삼성에 가지 않겠다"던 이 회장의 의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5년 9월 할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재현이를 왜 남의 회사에 가서 있게 하냐"는 불호령에 따라 다시 제일제당의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7년 넘게 제일제당 경리부, 기획관리부 등에서 근무했다.

이 회장은 본인이 젊은 시절 쉬운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학 재학시절 주변 친구들조차 이병철 회장의 장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만큼 신분을 일절 내비치지 않았고 씨티은행 입사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삼성에 입사해 신입사원 교육을 같이 받았던 한 인사는 "당시 교육을 받으면서 누구 하나 이병철 회장의 장손이 우리와 같이 교육받는다는 것을 몰랐다"며 "마지막 날 비로소 소개를 해줘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대중의 시각으로는 기업을 물려받은 '오너'지만 이 회장은 자신이 1993년 독립경영 선언 이후 삼성과 긴장관계 속에 CJ그룹을 성장시킨 '1세대'이자 전문경영인으로 인식되길 원했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은 공개석상에서 종종 자신이 '삼성이 아닌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일부러 밝히곤 한다. 또한 그룹 신입사원과의 대화에서도 "내가 그래도 사원 대리 과장 등 거칠 것은 다 거쳤다. 기간이 짧아서 그렇지"라며 솔직한 농담을 건네 자신이 '오너'가 아니라 신입사원들과 일정 부분 동질감이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험난했던 삼성으로부터의 독립과정

이 회장은 일찍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불화 속에 숨죽이며 평탄치 않은 성장기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부친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 사업에 대한 의견차로 소원해졌다. 이 때부터 이맹희 전 회장은 사실상 가족과 별거하며 별도의 삶을 살았다. 이후 삼성그룹의 후계자는 이건희 회장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 회장은 장충동 본가에 남아 어머니 손복남 고문과 할아버지 곁을 묵묵히 지켰다. 따라서 이 회장은 삼성가의 일원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삼성가의 일원이 아니었던 생활이 계속됐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세상을 뜨면서 그의 막막함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이 회장은 6년 후인 1993년 1월 갑작스럽게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발령받아 첫 임원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후 쭉 제일제당에 몸담았던 그에게 삼성전자 발령은 난데없는 일이었다. 당시 많은 언론에서 인사의 의미를 궁금해했다. 삼성 측은 "보다 큰 곳에서 경영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세간에는 "이재현을 자신이 오래 기반을 쌓은 제일제당에서 빼려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몇 개월 후 삼성그룹이 제일제당 분리 결정을 하면서 이 회장은 다시 제일제당으로 복귀했다. 1993년 6월 삼성그룹은 제일제당의 계열분리를 선언하고 이재현 이사 측이 경영을 담당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후 손복남 고문이 보유하고 있었던 안국화재 주식 15.6%를 1993년 10월부터 1994년 3월까지 이건희 회장 및 삼성그룹이 보유한 제일제당 주식과 맞바꾸면서 이 회장 측이 제일제당의 최대주주가 됐다.

하지만 삼성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삼성측은 제일제당에 이학수 당시 삼성화재 부사장을 파견, 제일제당이 보유한 부동산, 삼성생명주식 평가방법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삼성측은 다시 제일제당 주식을 사들이며 이 회장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1995년을 전후로는 이 회장 자택 옆에 CCTV가 설치돼 감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은 지난해 1월 열린 결심공판 최후 변론에서 "선대 이병철 회장의 자랑스런 장손이 되고자 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만 했던 세월이었다"며 "분리 독립 이후 경영권을 위협받는 특이한 상황에서 제일제당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을 갖고 뛰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일제당은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3월 정부 경제차관회의에서 친족간 계열분리 기준이 비상장사 지분율 10%에서 15%로 완화되며 법적으로 삼성그룹과 완전히 분리됐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가계도

◇친인척 사업영역 피하며 그룹 16배 키운 악바리

1995년 계열분리 직후 신사업을 구상하던 이 회장에게 한 참모가 대형마트 사업을 제안했다. 당시 상황으로 비춰보면 이 회장에게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식품기업 1위와 대형마트 사업 조합은 누가봐도 어울렸다. 이 회장이 자신의 마트에 제일제당 제품을 매대 전면에 내걸었다면 제일제당의 매출규모는 현재보다 훨씬 커졌을 터다.

또 당시는 대형마트사업의 태동기로 성장가능성이 농후해 마트사업 자체로도 매력적이었다. 고모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운영하는 이마트가 1993년 창동점을 개설하며 국내기업 중 최초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장이 마트사업을 검토했을 당시에도 매장이 5개에 불과했다. 이어 1998년 롯데마트, 1999년 홈플러스가 진출했다. 현재 대형마트 빅3가 갓 사업을 시작한 단계. 결과적으로 이 회장의 배려 덕에 이명희 회장은 마트사업으로 대박을 치며 신세계그룹을 재계 13위(2014년 기준. 총수없는 집단 제외)로 끌어올렸다. 장손으로서 돈보다 가족관계를 중시한 이 회장의 면모가 드러난 사례다.

대신 이 회장은 삼성가와 범 삼성가 통틀어 누구도 손대지 않았던 '문화사업'이라는 좁은 길을 택하며 오늘날 CJ그룹을 재계 14위로 키워냈다.

제일제당 최대주주가 된 직후인 1995년 이 회장이 동생 이미경 부회장과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 제작사 드림웍스 설립자인 스필버그 등을 만나 드림웍스 설립에 3억 달러(당시 환율 기준 2300억 원) 투자를 성공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이 회장의 나이는 35세였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초석이 된 드림웍스를 시작으로 1998년 4월에는 국내 최초의 멀티 플렉스 영화관 CGV를 설립했다. 1997년 IMF 위기로 모두 영화관 사업진출을 우려했지만 주머니가 얇아진 소비자들은 대리만족을 위해 오히려 영화관을 찾았으며 CGV는 크게 성공을 했다. 1999년 3000억 원 수준이던 한국 영화시장은 4배 이상 성장한 1조2000억 원까지 커졌다.

영화에 이어 90년대 후반 케이블 방송 사업에도 진출했다. CJ는 국내 케이블 방송 사업의 역량을 끌어올리고자 자체적인 방송 콘텐츠 제작을 위해 15년간 540억 원에 달하는 누적 적자에도 불구하고 약 400억 원 이상을 꾸준히 투자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슈퍼스타K'를 시작으로 '응답하라 1994', '꽃보다 할배', '미생' 등 히트작들이 탄생할 수 있는 문화 사업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

이 같은 문화산업 성공에 힘입어 삼성그룹 분리완료 직전인 1995년 1조7300억 원에 불과했던 CJ그룹의 매출은 2013년 약 28조 5000억 원으로 16배 이상 성장했다. 손쉽게 사세를 불릴 수 있는 대형마트 사업을 포기하고 이뤄낸 결과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경영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이재현 회장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그룹의 외적 성장도 성장이지만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식품회사로만 인식되던 제일제당(CJ)을 단기간에 '종합 생활문화기업'으로 변신시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이 2013년 7월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되며 CJ그룹의 투자시계는 1년 반 동안 멈춘 상태다. 이 회장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징역 3년의 실형을 받았으며 현재 상고해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자녀들, 부친 판박이 행보…사원으로 입사해 바닥부터 체험

이 회장은 장녀 경후씨(사진 좌)와 장남 선호씨(사진 우)를 자신과 같이 평사원으로 입사시켜 바닥부터 가르치고 있다.

이경후씨
경후씨는 미국 컬럼비아대 학부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조직심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2011년 7월 CJ주식회사 사업팀으로 입사했다. CJ그룹 사업팀은 각 계열사의 사업전략 수립 및 관리, 신사업 기획 등을 추진하는 곳이다. 경후씨는 여기서 사업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뒤 현재는 CJ오쇼핑 상품개발본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아들 선호씨는 컬럼비아대 금융경제학(Financial Economics) 학사 학위를 딴 직후인 2013년 7월 CJ그룹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대학시절 방학 때마다 CJ그룹 주요 계열사에서 인턴 체험을 하며 조금씩 일을 배우기 시작한 선호씨는 입문 교육 이후엔 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에서 대리점 영업, 마케팅 등 현장경험을 착실히 쌓고 있다. 현재는 제일제당 바이오(BIO) 사업관리팀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CJ그룹 관계자는 "사원, 대리, 과장, 부장 등 모든 직급을 거친 이 회장은 누구보다 현장 경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자식들도 밑바닥부터 실력을 쌓아올리길 원한다"고 말했다.

선호씨는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무리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평이다.

선호씨는 CJ그룹 입사직후 제주도로 신입사원 연수를 떠났는데 동기생들은 선호씨가 총수의 장남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군대를 면제받아 이른
이선호씨
나이에 입사한 막내 동기생쯤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동기생들이 선호씨에게 커피심부름을 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선호씨는 군말없이 다녀와 일일이 커피를 배달했다는 후문이다.

담배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연수 중 교육생들은 일과시간내에 흡연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흡연자인 선호씨는 동기생들과 쉬는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담배를 피는 소소한 일탈행위를 즐겼다고 한다. 감독관에게 발각돼 주의를 받기도 했다. 이외 선호씨는 해외에서 대학시절을 보낸 탓에 주로 유학파 동기생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두 자녀는 부친이 힘든 과정을 통해 CJ그룹을 일궈온 것을 곁에서 지켜봐왔고, 또 이 회장이 바닥경험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여느 재벌 3, 4세와 달리 진중한 자세로 경영수업에 임하고 있다는 평이다.

CJ관계자는 "경후씨는 성격이 소탈하고 꾸밈이 없어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반면 일에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이고 꼼꼼한 스타일이고, 선호씨는 스폰지처럼 흡수력이 빠르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아직 경영후계를 논하기엔 이르다는 것이 CJ의 반응이다. CJ관계자는 "나이나 직급이 어린 만큼 경영후계를 언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현장에서 착실히 경영 수업을 쌓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주)더벨 주소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영풍빌딩 5층, 6층대표/발행인성화용 편집인이진우 등록번호서울아00483
등록년월일2007.12.27 / 제호 : 더벨(thebell) 발행년월일2007.12.30청소년보호관리책임자김용관
문의TEL : 02-724-4100 / FAX : 02-724-4109서비스 문의 및 PC 초기화TEL : 02-724-4102기술 및 장애문의TEL : 02-724-4159

더벨의 모든 기사(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copyright ⓒ thebell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