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6년 09월 21일 08:4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퇴행(regression)의 정신분석학적 정의는 '보다 미성숙한 정신 기능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정신 기능이 무너질 만 한 외부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물러서는 것으로, 일종의 방어기제라 할 수 있다. 성장의 동기가 생존의 동기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일제 시대 '십자가 밟기'나 '창씨개명'과 같이 생존의 위협 앞에서 신앙이나 신념을 거둬들이는 것도 퇴행의 예라 할 만 하다.최근 국내 M&A 시장에 퇴행성 징후가 완연한 듯 해 우려스럽다. 2년 전 삼성과 한화 그룹 간 빅딜을 목격하며 국내 M&A 시장의 만개를 예견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2015년 만 해도 이 예견이 들어맞는 듯 보였다. 삼성과 롯데간에 두번째 빅딜이 성사됐고, 거래금액 6조원을 넘는 홈플러스 거래가 이뤄졌다.
시장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해가 바뀌고 시장은 얼어 붙었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든 것도, 기업들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계속기업의 성장과 생존의 가장 대표적 전략인 M&A가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일순간 사라진 이유는 뭘까. 기업 성장과 생존의 다른 전략이 있기 때문이라면 괜찮다. 굳이 M&A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어떠한 외부 충격으로부터 기업들의 M&A 동기가 꺾인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롯데 그룹은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이 벌어진 이후 기업 인수를 위한 전략 기능이 사실상 멈췄다. 보다 정확히는 형제간 다툼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다툼을 발화점으로 옮겨 붙은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 때문이다.
포스코의 M&A 전략 기능이 멎은 지는 꽤나 오래 전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성장 모델을 연구하며 M&A를 통한 사업 다각화 전략을 모색했던 몇 년 전의 그 포스코는 지금 온데 간데 없다. 포스코에게 안성맞춤인 글로벌 철강 M&A 시장 매물이 나와도 지금은 쳐다볼 엄두조차 안낸다. 2,3년 전에는 그래도 안타까움에 발이라도 동동 굴렀을런지.
외국 투자은행들 사이에 이제 더 이상 포스코 RM(Relationship Manager)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지 못할 소리도 들린다. 현직 CEO의 후임 이야기가 정치권에서부터 먼저 들리고 있으니 한숨부터 나온다. 시장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 가격을 질러 인수한 삼척 민자발전소 부지 사업 허가 건이 변수란 얘기도 나온다.
퇴행이 좋지 못한 현상인 이유 중 하나는 고차원에 있는 심리적 동기를 보다 저급한 동기로 끌어내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장을 꿈꾸는 자를 생존을 염려하는 처지로 만들고, 고차원적인 가치 추구 동기를 저급한 본능을 갈구하게 만든다.
퇴행의 원인이 오롯이 정치에 있든 없든, 재벌식 승계에 있든 없든, 일단 기업 조직 내부로부터 퇴행의 원인들에 저항하려는 용기를 내야한다. 무기력함에 익숙해진 채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라다가는 퇴행의 끝을 맛봐야 할 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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