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1년 05월 14일 07:3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개인형퇴직연금계좌(IRP) '수수료 제로(0)'가 대세가 되고 있다. 삼성증권이 포문을 열었고 미래에셋증권과 한국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까지 수수료 면제에 가세한다. 중소형사들도 못 버티고 동참할 듯 하다.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제로가 되어도 좋을 IRP 수수료를 그동안 왜 받았던걸까. 상품운용을 조언하고 퇴직금 입출금 등의 관리와 운용을 하는데 드는 비용이라고 사업자들은 설명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거리가 있다. 적극적으로 포트폴리오를 제시하는 것도, 가입자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아닌 퇴직금 입출금 등 단순 업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방치 수준의 가입자에게 계좌를 개설해 놨다는 것만으로 보수를 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
퇴직연금과 관련 납득이 잘 안 되는 건 또 있다. 정부는 지난해에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 계좌를 통해 부동산 리츠(REITs)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물론 한 종목당 전체 적립금의 30% 이상을 투자할 수 없다는 제한을 두기는 했으나 획기적인 규제완화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규제 완화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DC형 계좌에서 리츠를 매수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을 갖춘 사업자(미래에셋증권 제외)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안정성과 배당 매력으로 장기투자에 최적화된 리츠를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퇴직금 외 별도 개인 자금을 추가 납입해 IRP 계좌를 만들거나 아니면 미래에셋증권으로 퇴직연금 사업자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입자가 사업자 교체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근로자가 속한 회사와 교섭하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회사가 선택해 놓은 풀(pool) 안에서 사업자를 선택해야 한다. 사업자를 바꾸기 위해서는 전체 근로자, 즉 퇴직연금 가입자의 전체 동의가 필요하다.
혼합형 퇴직연금, 즉 DB(확정급여)형과 DC형을 함께 가입한 경우 두 유형을 통합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아 수기로 작성하는 사업자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산에 즉각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오류가 매번 나는 경우도 있다.
이쯤되면 퇴직연금 사업자들에 대한 신뢰는 바닥일 수밖에 없다. 열거된 것 외에도 금융과 IT 강국이라는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250조원 퇴직연금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보기 민망할' 정도다.
그러면서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정부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 디폴트옵션이 어떻고, 크게는 기금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등 사업자 중심의 퇴직연금 시장을 부르짖는다. 실제 가입자들에게 주는 혜택과 서비스는 엉망인데도 말이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스스로를 을(乙)보다 병(丙), 아니 정(丁) 정도 된다고 자괴한다. 퇴직연금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본사와 보수적인 가입자 틈바구니에 낀 퇴직연금 담당직원들의 볼멘소리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가입자들에게는 숨은 갑질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 아니 확신이 든다. 정(丁)의 갑질인 셈이다. 당신의 퇴직금은 안녕한지, 그걸 관리하는 사업자들은 어떤지 한번 쯤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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