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1년 12월 16일 07:4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극일(克日)' 이승만 정권 당시 "일본(축구)에 지거든 현해탄에 빠져 죽어라" 식의 전설이 아니다. 극일은 현재형이다. 웬 케케묵은 민족감정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2019년 일본의 조치를 떠올려 주고 싶다.일본은 2019년 하반기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의 수출을 묶었다. 반도체 노광·식각,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공정의 핵심 소재다. 일본 JSR, 신에츠 등이 70~90% 장악한 품목이다.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무기화하고 외교적 복수를 감행하는 어느 나라와 닮았다. 명백한 '금수조치'다.
일본의 조치는 뼈아팠지만 역으로 K-반도체 소부장 섹터에는 장이 서는 계기였다. 정부는 R&D 비용을 풀어 유망기업을 발굴·지원하고 해당 기업들은 과감한 양산개발 투자를 감행했다. 무엇보다 외산 대체가 갈급해진 고객사는 라인 테스트 문호를 열고 공동개발에 나섰다. 반도체 양산라인은 한번 퀄(인증)을 주면 좀체 바꾸지 않는다.
최근 반도체 소부장 섹터의 '2년'을 취재하기 위해 수원, 오산, 대구, 대전 등 각지를 돌며 '극일(혹은 극미)' 최전선의 이야기를 들었다. 반도체 가스설비 강관, 부품 제조기업 '아스플로', 원자현미경(AFM) 검사계측장비 제조사 '파크시스템스', EUV(극자외선) 소재 부품 개발기업 '에스앤에스텍', 포토레지스트 용 폴리머 전문기업 '엔씨켐', 전구체 전문기업 '디엔에프' 등이다. 일부는 일본 제조사에 '역수출' 하면서 주목 받기도 했다.
공통적으로 "정부의 각성과 고객사의 의지가 만나면서 양산개발의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신기술 개발 지원도 확대됐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일부 노광 용 첨단부품의 경우 양산진입 속도를 절반 수준으로 단축하기도 했다. 내년 고객사 양산라인에 진입하면 시장의 판도가 변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뻔한 이야기다.
한 CEO는 "극일 보다 없던 시장을 창출하는 자신감을 얻은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항거하는 '안티테제(反)'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테제(正)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에스앤에스텍이 EUV 펠리클 최초 양산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례나 넥스틴이 다크필드툴 장비시장에서 히타치의 성능을 압도하는 상황, 파크시스템스가 AFM 장비의 표준을 만들고 있는 게 같은 맥락이다. 디엔에프 역시 국산화 후발기업이 아니라 전구체 리딩컴퍼니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불과 2~3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여전히 '저팬테크'는 우리를 앞서 있다. 국산화율도 아직 미진하다. 하지만 일본의 도발은 거스를 수 없는 순류를 만들었고 K-반도체 테크들은 그 도도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거침없는 항해를 하고 있다. 그 선두에는 거북선(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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