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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사로잡은 예술]영국 무명작가의 작은 수채화 두점이 건넨 설렘박은관 시몬느 회장, 시몬느 본사는 하나의 커다란 아트 갤러리

서은내 기자공개 2024-05-20 08:32:30

[편집자주]

예술 작품에는 무한한 가치가 녹아있다. 이를 알아본 수많은 자산가, 기업가들의 삶에서도 예술은 따뜻한 벗으로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더벨은 성공한 CEO들이 미술품 컬렉터로서 어떻게 미술의 가치를 향유하는지, 그의 경영관, 인생관에 예술품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터뷰를 통해 풀어봤다.

이 기사는 2024년 05월 16일 10:0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68)은 스스로를 얼치기 아트 컬렉터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얼치기라기엔 무게감이 상당하다. 대략 20년간 수집해 800여점에 이른 그의 컬렉션은 시몬느 본사는 물론 베트남, 인도네시아 시몬느 공장 곳곳에 설치됐고 지방 미술관으로도 보내졌다. 경기도 의왕 본사는 건축물 자체도 걸작품이지만 내부 로비, 사무공간, 식당, 화장실까지 100여점의 예술품이 모인 커다란 아트 갤러리다.

37년 전 시몬느를 창업한 박 회장은 명품 핸드백 제조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핸드백 제조로 연매출 1조클럽에 가입한 시몬느는 럭셔리 핸드백 ODM(제조자개발생산) 세계 1위에 우뚝 서있다. 핸드백 제조계의 거장이 된 박 회장 뒤에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사랑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기부를 토대로 4년여에 걸쳐 핸드백 용어 사전이 만들어졌고 윤동주 기념관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가 17년동안 약 130억원을 기부한 자금이 모여 미국 미네소타 주에 8만평의 한국어 마을 '숲속의 호수'가 곧 완공된다는 스토리. 시몬느 번역상이나 새로 시작된 연세대 박은관 문학상 수상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그의 인문학 후원은 20년간 무수히 많은 갈래로 뻗어가고 있다.

박 회장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회 회장을 맡았다. 이 역시 문화예술계에서의 탄탄한 후원자로서 그의 역할을 엿볼 표식 중 하나다. 또 올해부터 인천 송도 2만여평 부지에 김창곤 교수의 핵석(core stone) 작품들과 시몬느의 핸드백 박물관 컬렉션을 집결시켜 새롭게 핵석 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이 모두는 인천시에 기부될 예정이다.

짧은 인터뷰로 박 회장이 수십년간 이어온 인문학, 문화 예술에 대한 애호를 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나눈 대화 중 길지 않은 말 한마디에도 예술 경영에 대한 의지와 깊은 진정성이 충분히 전해졌다. 그의 경영 곳곳에 아트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박 회장은 주요 미술 애장품들을 더벨에 소개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 경기도 의왕 시몬느 본사 내 전시 공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Q. 미술을 전공하거나 전문 컬렉터의 길을 걸어온 분은 아니다. 처음 예술품을 소유한 계기는 무엇인가.

A. 우연한 기회였다. 2002년 3월 영국 거래처 버버리에 상담차 출장을 갔다. 런던에 갑자기 눈 폭풍이 와서 비행기가 이틀간 끊겼다. 발이 묶인터라 그곳 박물관도 가보고 묵었던 리츠호텔 인근 갤러리 거리를 걸었다. 3시간 정도 돌아다녔는데 그 중 한 갤러리에서 베니스를 주제로 작가 3인전을 하더라. 그동안 별로 그림에 관심이나 조예가 없었다. 거기서 베니스 풍경을 그린 조그만 수채화 그림을 보는데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그래서 처음 내 돈을 주고 작품 두 점을 사봤다. 조나단 파이크의 그림이다.

박은관 회장이 처음 구매한 베니스 풍경 그림 두 점 중 한 점. 작가는 조나단 파이크(Jonathan Pike). The Pink Palazzo. 19x13. Watercolor on paper.
박은관 회장이 처음 구매한 베니스의 풍경 그림 두 점 중 한 점. 작가는 Jonathan Pike.

Q. 눈길을 사로잡은 그 작품의 매력은 무엇인가.

A. 놀랐다. 교감이 됐다고 해야할까. 내 동년배들이 고등학생이던 시절, 어디 공원 벤치에서 첫사랑 여학생을 만나 서로 손을 잡아볼까 할 때의 느낌이랄까. 조심스레 살포시 손을 포개려할 때의 어떤 설렘, 긴장감, 끌림 같은 거였다. 미술 전문가들의 표현처럼 색채가 날 휘어잡았다느니 그런 감정은 아니다. 내가 그림 보고 설레기도 하는구나 했다. 원래 럭셔리 제조업을 해오며 어느 정도의 아트 관련 지식은 있었다. 거래처와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하며 작가들도 만났지만 개인적인 울림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뉴욕 출장 때는 갤러리 생각이 나서 첼시,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를 돌아다니다가 첼시의 한 갤러리에서 던컨 한나(Duncan Hannah) 작가의 그림을 봤다. 첫 번째 베니스 그림보다 더 강한 끌림을 받았고 완전히 그림과 인연을 맺었다. 던컨 한나는 미국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작가다. 팝아트 신사실주의에 영향을 크게 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과 비슷한 분위기다.
Duncan Hannah. London by Night. 45,7 x 35.5. Oil on canvas.
Duncan Hannah. Green Citroen. 25.4 x 30.5. Oil on canvas

Q. 미술 애호가 분들과 모임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A. 최정표 회장(전 KDI 원장) 주도로 김순응 전 서울옥션·케이옥션 사장 등 열세 명이 모여 호요미라는 모임을 시작했다. 함께 미술 공부도 하고 갤러리들이나 작가를 초청해 작품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신진, 젊은 작가들을 인큐베이팅하는 목적이 컸다. 또 우리끼리 젠틀맨스 옥션이라는 간이 경매를 했는데 여기서 작품을 꽤 샀다.

Q. 지금 컬렉팅은 주로 해외 갤러리를 통해서 많이 하겠다.

A. 출장차 매년 미국에 네다섯번 가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베트남 호치민 등에도 1년에 서너번씩 출장 가는데 매번은 못해도 10번 중 세번은 짬 내서 그림을 본다. 미국은 첼시나 놀리타, 브룩클린 쪽 갤러리가 모인 거리에서 구경도 하고 배우거나 사기도 한다. 참고로 베트남에도 좋은 그림이 많다. 베트남은 1900년대 초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아트스쿨이 만들어졌다. 우리나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서양의 발전된 미술을 접하지 못할 때 그들은 파리 유학을 간거다. 우리도 일제시대 때 나간 이들이 있지만 대부분 1960년~1970년대부터 작가들이 유학을 나가기 시작했다.

Q. '최애' 애장품을 꼽는다면.

A. 가장 애착 갖는 작가는 네 명 정도다. 볼 때 가장 편안하고 아끼는 건 고 김환기 선생 작품이다. 최근 청주 청남대 전시에도 11점을 보내드렸다. 선생의 작품은 이미지도 좋고 전통 쪽빛, 푸른빛의 파스텔톤 색감이 좋다. 달, 여인, 항아리 같은 소재도 그렇고 그림을 보면 굉장히 편해져서 오래 본다. 선생의 작품은 옥션에서 사서 이제 모으기 시작했다. 제일 좋아하는 건 그 중 '정원'이란 작품이다.

던컨 한나(Dunan Hannah) 작품도 몇 점 있다. 처음 산 재규어 자동차 그림, 밤 거리 가로등 켜진 그림이 대표적이다. 던컨 한나는 미국을 대표하는 애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를 생각나게 한다. 호퍼의 작품은 수천만 달러씩 하니 그건 소장 엄두가 안났다.

또 하나는 베트남 작가 당수안호아(Dang Xuan Hoa)다. 붓을 매우 터프하게 쓴다. 또 한명은 조나스우드(Jonas Wood)다. 요즘 미국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중 하나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와 비슷한 풍인데 만난지 10년밖에 안됐다. 미국 가고시안 갤러리에 갔다 소개로 샀다. 가장 소장작품 수가 많은 건 마리킴 작가다.

시몬느 본사 로비에 전시된 당수안호아의 작품. Spring's melody. 90 X 180. Oil on canvas.
시몬느 본사 로비에 전시된 조나스우드(Jonas Wood)의 작품 Bird and Lion Pot과 Speaker Still Life.
시몬느 본사 구내 식당에 걸린 마리킴 작가의 그림.

Q. 예술품 애호가 경영 마인드에는 어떤 시너지를 일으켰나.

아트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다. 나의 컬렉션들을 직원들을 위해 본사 건물 곳곳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가나화랑의 한 친구가 6개월간 내 컬렉션 목록을 정리해줬다. 3개월에 한번씩 내 컬렉션을 가지고 직원들을 위해 기획, 큐레이팅도 해주고 있다. 본사 건물을 다 채워도 100점 밖에 못 건다. 그래서 3개월에 한번씩 내부 순환 전시를 한다.

베트남에도 50점이 있다. 서울에서 좋은 작품들도 보냈지만 10년간 베트남 현지 갤러리를 다니며 좋은 작품을 사서 우리 공장 공원, 직원을 위해 벽에 갤러리식으로 걸어놨다. 인도네시아 공장에는 인도네시아 작가, 베트남은 베트남 작가 작품 위주로 본사처럼 전시하고 있다.

해외 바이어들도 우리 회사를 보고 놀라더라. 핸드백의 디테일을 허무는 실, 컬러 하나에다 약칠하는 색깔 매치 등을 거래처 디자이너들이 세세히 따지는데, 디자이너들이 회사의 예술적인 분위기를 보더니 그냥 우리에게 맡기고 가더라. 시몬느 스탠더드(standard) 라는 게 있다. 그냥 우리 기준, 시몬느 스탠더드로 맞춰 달라고 하고 간다.

Q. 직원 만족도가 높겠다.

A. 물론이다. 회사에 그림, 조각 작품 몇개 갖다 놨다고 직원들의 감성이 막 올라가거나 문화예술적 소양이 좋아지는 건 절대 아닐거다. 다만 이런 발상을 할 수도 있구나 하며 영감을 받고 천천히 젖어드는 거다.

로비 갤러리에 의자 두개를 뒀는데 원가가 6만원밖에 안들어가는 의자다. 공사할 때 쓰는 철근 위에 색을 입힌 건데 내가 이 의자를 일본에서 살 때 가격이 300만원이었다. 6만원을 들여 수백만원 가치의 제품이 만들어진다. 이게 바로 디자인과 브랜드의 힘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은관 회장이 디자인과 브랜드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면서 보여준 의자.

시몬느는 현재 유럽에서 셀린느, 로에베, 지방시, 버버리와 미국에서는 토리버치, 코치, 마이클 코어, 랄프로렌, 마크 제이콥스 등 럭셔리 브랜드들과 일하는데 이런 럭셔리 브랜드의 마케팅은 본인의 정체성과 스토리를 만들어 주고 판타지를 주는 영역이다. 아트, 컬처와의 협업이 꼭 들어간다.

현재 세계 디자인, 패션 분야에서 코리안 커넥션이 가장 크다고 한다. 한국 디자이너 인적 풀이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데에도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가 잘 안나온다. 한번은 파슨스 디자인스쿨 총장 등 그 분야 사람들과 얘기를 해봤다.

왜 한국 스타가 안나오냐 했더니, 유럽 출신은 어릴 때부터 이쪽에는 레오나르도다빈치 작품, 저쪽에는 두오모 성당이 있는 곳에서 자연스레 예술 감각에 젖어들었다는 거다. 밤새 책으로 공부해서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나라, 도시, 집안, 엄마의 옷 입는 것 하나로 영향이 다를 수 있다.

시몬느 본사 건물 내부 전시 공간.

Q. 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후원을 하고 있다. 기업가 후배들에게 도전이 될 것 같다. 이렇게 후원자로 나선 이유가 궁금하다.

A.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기업 또는 개인의 발전 단계를 생각해보면 배움, 이룸, 나눔 순이라 생각한다. 일단 기업이든 개인이든 배워야한다. 학교, 사회에서 배우고 노력하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될거다. 그러니 두 번째는 성취 즉 이룸이다. 궁극적으로는 나눔인데 꼭 이뤄서 나눠야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룸과 나눔은 같이 갈 수도 있다.

저는 인문학, 특히 한국학과 한국어 분야에서 조용히 후원하고 있다. 크지 않고, 남들 눈길이 잘 안 가는 분야를 중심으로 나누는 거다. 해외에서의 한국어 교육, 한국어가 잘못 사용되는 것을 한국어 용어 사전을 만들어 바꿔주는 것, 문학상, 번역상 이런 것들이 다 후원이 잘 안되는 영역이다. 그게 더 의미있는 것 같다.

Q. 인문학을 집중 후원하는 이유가 있나.

A. 문학도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해야한다. 우리 작가들의 질적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국제적으로 덜 알려져 있고 포지셔닝이 약하다. 그 이유는 홍보와 번역을 제대로 해서 알리는 역할이 부족해서다.

케이 팝, 케이 드라마, 스포츠, 클래식 등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 비해서도 이 부분이 약하다. 문학은 투자와 홍보를 긴 호흡으로 이어오는 역할이 없었다. 질적 수준을 따져보면 노벨문학상도 나올 때가 됐다. 나 혼자 후원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디딤돌이라도 만들어 보고 싶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 경기도 의왕 본사 건물 내에 위치한 실내 정원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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