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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사로잡은 예술]쿠사마 야요이 <호박>과 나눈 30분간의 대화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 "예술은 창의적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

서은내 기자공개 2024-05-30 10:51:07

[편집자주]

예술 작품에는 무한한 가치가 녹아있다. 이를 알아본 수많은 자산가, 기업가들의 삶에서도 예술은 따뜻한 벗으로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더벨은 성공한 CEO들이 미술품 컬렉터로서 어떻게 미술의 가치를 향유하는지, 그의 경영관, 인생관에 예술품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터뷰를 통해 풀어봤다.

이 기사는 2024년 05월 28일 08:1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검사와 예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단어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예술품 향유의 모델을 제시해가고 있다. 25년간 검찰에 몸담아오다 대전의 에너지 기업 CEO로 변신한 황인규 CNCITY에너지(옛 충남도시가스) 회장의 이야기다. 황 회장은 지역 문화예술 공간의 조성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며 예술이 갖는 가치의 외연을 넓혀왔다.

검사 시절 박수근 위작 사건을 계기로 미술에 관심을 가진 황 회장은 회사를 경영하면서부터는 아트 컬렉터로서도 예술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황 회장에게 예술품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창의적인 질문을 가능케하는 통로이자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매개로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황 회장은 대한도시가스 창업자 고 황순필 회장의 장남이다. 1991년 서울지검 검사로 시작해 2014년 인천지검 부천지청장으로 퇴임한 후 CNCITY에너지 경영에 뛰어들었다. 사업가로서 행보를 이어온 지난 10년간 그는 문화재단을 만들고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HEREDIUM)'을 개관하며 대전 지역의 문화수준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다.

헤레디움은 '물려받은 유산' 이란 뜻이다. 황 회장은 일제 강점기 수탈을 위해 지어졌던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을 인수, 복원해 전시와 클래식 공연을 펼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한때 아픔의 공간이 미래세대의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수준을 높여줄 희망의 공간으로 재현되고 있다.

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 헤레디움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Q. 그림에 관심을 가진 배경이 궁금하다.

A. 2005년 외교통상부에 장관 법률자문관으로 파견을 갔다. 그 때 박수근 위작 사건이 있었다. 검사가 그림까지 알아야하나 하던 차에 가나아트 포럼을 소개받았고 그림 강의를 들었다. 법 공부만 하던 내게 새로운 세계였다. 박수근 그림은 한국전쟁 후 피폐했던 역사의 장면이라고 하더라. 그림 속에 청년은 없다. 전쟁 중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나이많은 어른, 여자들만 나온다. 서로 바라보고 있으나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나무엔 잎사귀가 없었다. 미래에 대한 상징으로서 아이들이 나온다. 그림 한 점에 시대 정서, 시대상이 담긴다는 걸 그 때 알았다. 그 당시의 정서를 가진 분들은 박수근의 그림을 많이 샀다.

Q. 눈길을 사로잡은 첫 예술품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A. 그림을 공부하면서 한번 직접 사보고 싶었다. 2000년대 초반, 미술 시장이 한창 핫하고 투자붐도 불 때였다. 중국 그림이 100억원 이상을 호가하고 박수근의 빨래터가 40억원 넘는 가격에 팔리던 시기였다. 당시 가나아트 이옥경 부회장 사무실에 갔는데 왼쪽을 보라고 해서 봤더니 김환기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오른쪽을 보라고 하더라. 고개를 돌리니 김환기 선생의 또다른 작품이 있었다. 달과 새 두마리가 그려진 그림. 그게 훨씬 더 좋아보였고 그걸 샀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비교해 봐야 한다는걸 그때 알게됐다.
김환기, Untitled, 연도미상, oil on canvas, 51.5 x 41 cm

10년 뒤 검사를 그만두고 사업하면서 컬렉션을 시작했다. 처음엔 블루칩 작품을 샀다. 옥션을 주로 보다가 애호가들과 '아르케'란 모임을 만들었다. 함께 돈을 모아 그림을 사고 몇년 뒤 경매에서 작품을 팔기로 했다. 김환기, 장욱진, 이우환 화백 그림을 많이 봤다. 그러다 아트페어 바젤에 갔는데 미술의 세계가 이렇게나 넓구나 했다. 구상회화가 좋았는데 갈수록 추상화가 좋아졌다.

Q. 개인적인 혹은 인간적인 교감을 한 작품은 무엇이었나.

A.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의 호박 그림이다. 2017년 경 홍콩 경매에 나왔는데 구매를 추천받았다. 조그마한 그림인데에도 가격이 너무 비쌌다. 쿠사마 작품 중 위에 콜라주가 있는 작품이라 더 가치가 높다고 들었다. 좋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림 앞에 앉아 30분 동안 호박과 상상 속 대화를 했다. 구석구석 보며 어디가 예쁜지 한참 얘기하다 결국 '너 나한테 와'라고 했다. 옥션에서 대만 여성과 경합이 붙었고 끝까지 붙어 낙찰받았다. 이후 작품 가격도 크게 오르더라.

Q. 쿠사마 그림이 왜 그렇게 좋았나.

A. 일단 그만의 세계가 있다. 누가봐도 쿠사마란 걸 알 수 있다. 독창적인 그만의 기법, 주제로 그리다보니 베낄 사람이 없다. 대가들의 그림은 그냥 그려진 게 아니라 겹겹이 정신 세계가 쌓여져 그려진다. 그런 스테이지(stage)가 있는 그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단순해지고 더 깊은 뜻을 갖는 묘한 경향이 있더라. 그림은 언어 같아서 처음에는 구체적인 뜻을 가진 형상으로서 이해하려 애쓰게 되는데, 익숙해지다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냥 정확히 뭔가로 번역할 수 없는,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림은 다 취향이다. 미인을 얘기할 때 눈, 코 비율을 따져 얘기하지 않는 것 처럼, 그냥 보고 좋다고 느껴지는 거다.

쿠사마 그림을 만났을 때와 같은 경험이 또한번 있었다. 미스터(MR)라는 일본 작가 그림을 아트바젤 홍콩에서 봤는데 일본 만화 같은 그림이다. 이런 만화를 많이 보며 자라서인지 익숙했고 사고싶었는데 솔드아웃이었다. 옥션에 미스터 그림이 또 나왔는데 앞선 대기자가 있었다. 한 30분 또 그림과 대화했다. 다른 그림은 눈에 안들어왔다. 다음날 전화가 왔는데 먼저 사려던 사람이 못 사게됐다더라. 그림이 너무 커서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해 구매자의 가족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 그림은 내게 왔다.
MR, A Journey with no Goodbyes, 2016, acrylic, pencil,
and collaged linen on cotton mounted on wood panel, 221 x 180.3 x 5.7 cm

Q. 애장품 'Top 3'를 꼽는다면.

첫번째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작품이다. 작가 자체가 매력적이다. 철학적 깊이도 그렇고 작품 스케일이 상상 이상이다. 키퍼 작품은 특히 소장의 기쁨이 있다. 구매 후 습도 탓에 배송 과정에서 작품에 문제가 생겼는데 작가에게 다시 수리를 받은 스토리가 있다.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작품도 좋아한다. 내가 소장 중인 건 독수리 네 마리가 돌아가는 건데 굉장히 좋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그냥 보면 좋다. 다만 최애 작품은 처음 산 김환기의 작품이다. 아내도 그렇고 그걸 가장 좋아한다.

Georg Baselitz, Remix(windrad), 2006, oil on canvas, 300 x 250 cm
Q. 어디서 주로 작품을 구매하나.

A. 초기에는 옥션이었는데 지금은 아트페어에서 기회가 많다. 프라이머리마켓(화랑, 아트페어)이 아무래도 좀더 저렴한 경향이 있고 진위 리스크도 덜할 수 있다. 인보이스 등 거래 명세서를 확실히 모으는게 중요하다. 그림을 공부하려면 사봐야한다. 상당수 국내 컬렉터들이 갤러리에서 추천하는 걸 사게되는데 그러다보니 대부분 비슷한 컬렉션이 많다. 실패는 없겠으나 다양성이 부족하고 취향을 알기 어렵다. 나도 사실 그렇다. 취향이 계속 변하고 뒤죽박죽 방황하기도 했다.

그림을 사면서 알게된 중요한 사실은 세컨더리마켓(2차 시장)에서 작고 작가의 작품은 비싼 그림이 제 값을 한다. 시장이 안 좋을 때에는 좋은 그림이 안나온다. 그림 값이 오르는 시기에 좋은 그림이 나오는데 그걸 사야된다. 사고나서 상당기간 그림 값이 다시 안 좋을 수는 있으나 호황이 왔을 때 팔 수 있다.

그림 가격은 단기간에 오르지 않는다. 사는 건 쉬워도 파는게 어렵다. 가격이 올라도 인플레이션이나 수수료를 감안하면 이익 남기기 어렵다. 컬렉션을 하겠다 한다면 돈을 묶어둔다고 생각하고, 정말 자기가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 중 살 수 있는 작품을 사야한다. 투자 목적으로도 많이 한다고들 하는데, 그건 맞지 않는 듯 하다.

Q. 예술품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4차 산업혁명을 거치고 라이프스타일 관련 산업이 발달하면서 대중들에게 여가가 많아졌다. 일은 효율적으로, 적게 하고 여가를 늘려주는 게 라이프스타일 관련된 산업들이다. 그럼 여가는 어떻게 즐길까. 여기서 예술이 엄청 큰 자원이 된다. 아트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도 해소된다. 작가를 깊이 알아보고 작품과 그 배경을 탐구하다보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예술 속에서는 이상한 행동도 비난받지 않는다. 예술은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 줄 매개가 된다.

Q. CNCITY사업과 함께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 사업은 어떤 의미가 있나.

A. 과거 내가 서산지청장이던 시절 연탄배달 봉사를 했는데 배달을 가는 곳에 이미 연탄이 많이 쌓여있더라. 불우이웃의 기초생활을 돕는 것은 국가, 지자체의 사회사업만으로도 대부분 충족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좀 다른 방식의 기여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에너지 회사로서 에너지 안전 관련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데, 그 외에 청년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게 뭘지 고민했다.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게 뭘까. 그림, 음악으로 자기만의 감성을 개발하게 돕는 것이 우리나라의 수준을 높일 방법이라 생각했다.

1922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점 사진.
대전은 역사상 근대 건물이 많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정성 들인 도시 중 하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건물도 버려진 상태로 등록문화재가 됐다. 망가진채로 두기보다 지역에 대한 기여로서 미술관,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작가 중 국내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싶었다. 첫번째 개인전 작가는 안젤름 키퍼, 현재 진행 중인 두번째 개인전 작가는 레이코 이케무라(Leiko Ikemura)다. 레이코는 일본인이지만 유럽에서 성장했고 스위스 국적을 가진 신표현주의 작가다. 그 문화적 다양성이 그림에 다 묻어난다.

레이코 이케무라의 작품. 황인규 회장 소장품.

Q. 헤레디움을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비전이 궁금하다.

A. 통을 굴린다고 생각해보자. 안에서 굴릴 수 있고 밖에서 굴릴 수도 있다. 안에서 굴리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제 통 밖으로 나와 방향을 보고 굴려야 할 때다. 예술은 좋은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청년들이 질문하고, 생각하고, 통 밖으로 나와, 통을 굴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가고 싶다. 청년들이 밖으로 나와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며 자라나길 바란다.

대전 헤레디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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