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기사는 2009년 03월 19일 11시09분 thebell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바둑판의 19로를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게으른 아마추어의 바둑 공부야 뻔한 것이지만 판을 망치는 것은 대개 마음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둑 공부는 못해도 마음공부를 담은 바둑 십계명, 위기십결(圍棋十訣) 만큼은 간간이 찾아 읽어 본다.
위기십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제5조 사소취대(捨小取大)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모든 것이 아쉽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느냐가 위기의 전개양상을 바꾼다.
위기십결에는 유독 버리는 것에 대한 언급이 많다. 6조 봉위수기(逢危須棄)는 가능성이 없는 곤마를 과감히 포기하라는 것이고, 4조 기자쟁선(棄子爭先)은 돌 몇 점을 버리더라도 선수(先手)를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미다.
부실부문에 대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지원은 누구나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밑 빠진 독’이 정권의 핵심 지지 기반일 때가 많다. 지지 기반에 메스를 가하고 대세(대의=명분=선수)를 잡느냐, 아니면 그저 지지층의 요구에 충실하느냐, 역사의 얄궂은 딜레마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이 오바마 정부의 성패를 가를 시금석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위기십결의 제1조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다. 너무 이기려고 조바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위기의 근본을 밝히기도 전에 종료 시점부터 짚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결국은 겪을 것을 다 겪어야 가닥이 잡히는 법이다. 위기극복에 대한 지도자의 확신은 공포를 이기는 메시아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장의 탐욕만 자극하면 구조조정의 거친 길이 더욱 험난해진다.
위기십결은 여러 차례 신중함을 강조한다. 제2조 입계의완(入界誼緩)은 경계를 넘어 진입할 때 느긋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큰 위기에서의 성급함은 악수를 부른다. 몸통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봐야 깃털만 날릴 뿐이다. 뜸도 들이고 더듬수도 놓아 보면서 형세 판단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은행의 디레버리징은 작금 금융위기의 핵심 과제다. 그런데 당국은 대출축소를 극력 만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 구조조정을 채근했다. 분명히 모순된 접근이지만 계산된 더듬수일 가능성도 있다. 유동성 공급으로 어느덧 회사채 시장의 분위기가 뜨거워지고, 구조조정과 자본확충을 위한 기금조성이 가닥을 잡았다. 이렇게 준비가 갖춰지면서 대출축소를 말리던 목소리도 잦아들고 대신 연체율 상승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절묘한 수순에 의해 디레버리징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꿈보다 해몽인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제7조의 신물경속(愼勿輕速)이 말하듯이 성급하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
제3조 공피고아(攻彼顧我)에서는 공격에 나서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한다. 같은 위기라도 처지에 따라 대책은 달라지는 법이다. 위기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남의 탓만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허물을 먼저 살펴야 한다.
또 하나, 선진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다른 우리만의 특성과 한계를 자각해야 한다. 자본의 축적에 비해 자본시장의 개방도가 높고, 자원이나 내수보다는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큰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높은 변동성은 일종의 숙명이다. 금융과 기업 모두가 남보다 더 철저한 재무적 방어능력이 요구된다. 재무적 안정성 강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회사채 시장의 향배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제8조 동수상응(動須相應)은 행마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다. 위기 대책들이 서로 겉돌면 비용이 엄청나게 커진다. 예를 들어 건설부동산업은 구조조정의 핵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수활성화 정책의 중심 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내수활성화도 필요하지만 구조조정을 무력화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면 디레버리징은 불가능해진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양상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금융시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은행의 디레버리징은 반드시 회사채 시장 활성화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신용시장의 충격을 최대한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구조조정은 반드시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한 휴머니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위기가 사회적 불안으로 확산되면 위기극복은 물 건너 간다. ‘부자 나라’를 꿈꾸다 ‘부자들의 나라’가 되어버린 나라들이 모두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하고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지막의 제9조 피강자보(彼强自保)와 제10조 세고취화(勢孤取和)는 형세가 어려울 때는 우선 내부를 다지라는 주문이다. 위기십결의 일관된 신중함이 묻어나지만 공격의 신중함이 아니라 수비적인 입장에서 약점 보완을 강조하는 점이 다르다.
전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단기적인 경기와 금융시장 동향에 연연하기 보다는 내부 모순을 우선 해결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한국은행의 유동성 공급으로 일단 위기의 확산을 막았다. 하지만 건설부동산 거품과 유동성 미스매치 등의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어쩌면 유동성 랠리에 묻혀 구조적인 접근이 더 어려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내부를 다지는 지혜가 무척이나 아쉬운 시점이다.
그러나 위기십결의 가장 큰 가르침은 마음 공부 그 자체가 아닐까 한다. 그 만큼 바둑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바둑판 19로 361점의 변화를 대하는 마음 자세는 달라진다. 고전파 경제학자 W. Bagehot은 “특정한 시기에 엄청난 수의 멍청한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멍청한 돈을 보유한다. 그러면 투기가 일어난다. 그러면 공황이 일어난다”고 했다. 돈의 광기를 수습하는 지혜를 마음 공부에서 찾아보는 것도 유익하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소개]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 약력
2001∼ 굿모닝신한증권 선임연구위원
1988∼2001 한국신용정보, 연구개발실장 화학산업평가실장
KAIST MBA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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