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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기관 톺아보기]88올림픽의 선물, 예술의전당②[설립과 의의]방송광고수수료 재원, 1055억 투입…국내 최고 문화공간

고진영 기자공개 2024-05-13 10:52:36

[편집자주]

공공극장은 공간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다. 창조의 장이자 공연 문화의 산실이다. 국내 첫 국립국장은 1950년 부민관에서 개관했다. 이후 뚜렷한 거처 없이 피난지였던 대구 문화극장, 명동 시공관 등을 전전하다 1973년 남산 기슭에서 새로 문을 연다. 문화예술진흥법이 막 제정되면서 문화정책 기틀이 자리잡았던 때다. 그리고 1978년 세종문화회관이 설립. 1988년엔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신(新) 국립극장'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의 전당이 만들어졌다. 이제 70년의 역사를 지난 공공극장의 현재는 어떨까. 더벨이 살펴본다.

이 기사는 2024년 05월 10일 08:0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80년대 초반 문화계는 인프라가 변변치 않았다. 전국에 음악당이 고작 둘 뿐이던 시절이다. 세종문화회관이 있었으나 인구 천만의 대도시를 감당하긴 어림 없었다. 예술 운운하면 배부른 소리 취급하던 단계를 지나긴 했는데, 인식 변화를 받쳐줄 시설이 모자랐다.

예술의전당 건립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때는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즈음이다. '문화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일었고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설립되면서 공익자금으로 재원이 마련됐다. 척박한 문화예술계에 찾아온 경사였다.

◇추진 배경은…'올림픽, 한국방송광고공사'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한국방송광고공사의 발의로 예술의전당 건립계획이 추진된다. 방송공사의 개입은 다소 뜬금없지만 여기엔 정치사회적 요인이 깔려 있다.

당시 언론 통폐합이 단행되면서 후속 조치로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세워졌는데 방송 광고권 독점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예술의전당에 대한 지원은 정당성과 명분을 살리기 적당했다. 마침 문화올림픽을 상징할 만한 복합예술공간이 필요했으니 여러모로 조건이 맞았다.


그래서 예술의전당 건설 재원은 엄밀히 말하면 국고가 아니라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광고대행수수료로 채워졌다. 한국방송광고공사법 제1조(목적)가 "예술 진흥사업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추가해 1982년 개정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공익사업에 국한됐던 지원범위를 확대하고 방송광고 수입을 예술의전당 건립 예산으로 쓰려면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난항 겪은 부지 선정…84년 11월 첫삽

건립이 확정된 뒤에도 부지 선정은 간단치 않았다. 처음엔 장충공원 지역, 영동 종합 전시관 지역, 난지도 개발 지역 세 곳을 후보로 꼽았다. 하지만 서울시청을 서초구로 이전하려는 계획이 보류되자 서울시청사 건립부지가 후보로 급부상했다. 건립추진위원회가 모델로 삼았던 영국 바비칸센터, 프랑스 퐁피두센터처럼 도심 속 복합공간을 염두에 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서울시청 부지(지금의 대법원, 대검찰청 자리)는 토지 수용법상 용도 변경이 불가능했고 서울시도 매각을 꺼렸다. 계획이 무산되면서 부지 선정작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국 논의 끝에 낙점된 곳이 서초동 우면산 일대다. 교통과 주변환경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올림픽 개최 전에 완공하려면 부지 선정에 더 시간을 쓸 여유가 없었다. 군사 보호지역인 데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서 부지매입에 어려움도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지를 정하고 나니 기획과 설계가 과제로 떠올랐다. 1983년 8월 1일 예술의전당건립본부를 꾸려 건립안을 만들었고 다음해 11월 첫 삽을 떴다. 문화사적 의미가 워낙 컸던 만큼 기공식은 신문 1면을 장식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대비해 1986년 1단계 개관, 1987년 2단계 개관을 목표로 잡았다.

◇파이프오르간 왜 없을까

7만평 대지에 건물면적 3만평 규모. 전문 공연 시설을 짓기엔 무리가 있었던 일정이다. 일본만 봐도 신국립극장 설립위원회를 발족해서 개관하기까지 25년, 영국 바비칸센터는 30년이 걸렸다. 반면 예술의전당은 1982년 조사를 시작해 4년 만에 1차 개관을 계획했으니 빠듯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잡음이 예고된 것과 다름없었다. 공사비용이 원래 경비보다 추가되고 주예산인 공익자금은 해마다 삭감됐다. 당연히 공기도 지연됐다.

예술의전당에 파이프오르간이 없는 것도 공사가 급하게 진행된 탓이 크다. 애초 음악당 합창석 뒷편에 오르간 설치를 위한 공간을 설계해뒀다. 그런데 개관일을 맞출 수 없어 일단 미루고 간이마감을 했다. 발주부터 최소 1년 이상, 설치만 6개월이 걸리는 대작업이기 때문에 이후로도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비용 대비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갑론을박 역시 있었다.

1996년 파이프오르간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당시 정명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가 내한했는데 연주곡 가운데 생상스의 <교향곡 3번>은 파이프오르간이 관현악 편성에 포함된 작품이었다. 예술의전당은 궁여지택으로 전자오르간을 빌려 대외적 망신을 샀다. 그 뒤에도 파이프오르간을 건립하겠다는 움직임이 여러번 일었으나 여전히 빈 자리, 숙원으로 남아 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또 예술의전당 서울오페라극장의 경우 공사비가 예산의 배로 들면서 건립을 포기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 비용 부담을 느낀 정부와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서울오페라극장 무용론'을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예산을 낭비했다며 감사원의 감사마저 받았다. 하지만 예술의전당이 처음부터 부지 전체를 동시에 터파기했고 이미 공사를 진행 중이라는 주장으로 버틸 수 있었다.

◇8년만의 완공, 국내 최고 복합예술공간

마침내 1993년 2월 15일, 서울오페라극장 오픈을 끝으로 예술의전당이 전관 개관했다. 1988년 2월 음악당과 서예관을 완공하고 1990년 10월 미술관과 예술자료관을 지었다. 이어 가장 규모가 큰 서울오페라극장의 건립을 마쳤다. 8년 3개월의 공사. 정부수립 후 최대 규모의 문화사업으로 한국방송광고공사 공익자금 1055억원이 투입됐다.

예술의전당 서울오페라극장

그 전까지 공연예술공간은 공연장과 강당이라는 두 개념이 뒤섞여 있었다. 말하자면 공연예술이 공공집회장에 기생하는 형태다. 공공집회장으로 지어져 공연장으로도 쓰이던 부민관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이런 다목적 홀은 진정한 문화공간이 되기 어렵다. 문화보다는 공공집회에 치우치기 떄문이다.

예술의전당은 이런 '비예술적' 모습을 벗어나 예술 전용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처음으로 갖춘 공공극장이다. 음악당을 비롯해 서예관과 미술관 등 각 예술장르에 맞는 전용홀을 하나의 공간에 두루 마련한 것도 국내 최초였다.

현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2005년 리노베이션을 거쳐 2505석 규모로 운영되고 있다. 케네디예술센터 콘서트홀과 바비칸홀 규모 이상이다. 국내 최초의 오페라, 발레 전용극장인 서울오페라극장 역시 2008년 리노베이션을 거쳐 지금의 2340석 규모로 재개관했다. 케네디예술센터 오페라하우스(2364석)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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