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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증권시장과 컴퓨터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4-12-02 09:00:15

이 기사는 2024년 12월 02일 08:1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증권의 매매는 구두계약으로 이루어지다가 지금은 전자신호를 교환하는 방식을 쓴다. 계약은 빛의 속도로 체결되지만 이행에는 시간이 걸린다. 또, 같은 쌍방 간에 매수와 매도가 복수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청산을 해야 한다. 청산을 한 후에 남는 잔고를 결제한다. 이 과정은 3일이 걸리고 그래서 T+3 규칙이라고 부른다. 원래 T+17이었다. 증권시장 초창기에 런던과 암스텔담 사이에서 거래가 체결되면 마차와 배로 실물을 운반해서 교환하는 데 지금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금이나 상품거래도 마찬가지로 결제하고 청산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다. 경제성장과 증권시장 활황으로 거래가 늘어나면서 청산과 결제의 규모도 같이 커졌다. 1960년대에 월스트리트에서는 증권거래량이 급증했다. 1965년에 하루 500만 건이었는데 1968년에 1,200만 건으로 늘어났다. 다수 인원을 투입해서 청산과 결제를 했지만 폭증하는 거래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미국 정부는 청산결제일을 5일로 늘렸다.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개장 시간을 줄이고 매주 수요일에 휴장까지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 사태를 이른바 ‘Back Office Crisis’라고 부른다.

당시 모든 작업은 장부 기재와 현물 교환의 수작업이었다. 결국 거래가 일어나고도 청산과 결제를 못하는 상황이 빈발했다. 그렇게 되면 그 투자은행은 고객을 잃게 된다. 고객은 매수한 증권을 되팔아서 돈 벌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매도한 증권이 결제가 되지 못하면 돈이 제때 들어오지 않아 손해를 입는다. 그런 일을 당하면 다시는 해당 투자은행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다. 산더미같이 쌓여가는 주권 실물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도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고객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대부분의 소매증권업무 중심 투자은행들이 결제업무를 비롯한 후선 지원업무를 전산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메릴린치와 같이 컴퓨터 설비에 일찍부터 대대적인 투자를 행한 투자은행들만이 예외였다. 1960년대의 컴퓨터는 IBM System 360 같은 메인프레임이었다. 작은 사무실 하나를 꽉 채울 크기였지만 연산 능력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전화기의 100만 분의 1에 불과했다.

어쨌든 돈이 있는 대형 투자은행들은 청산과 결제를 부랴부랴 전산화하기 시작했고 그럴 역량이 못되는 회사들은 고객 이탈로 퇴출되었다. 1969년과 1970년 두 해 동안 뉴욕증권거래소 회원사 전체의 1/6인 약 100개의 증권사가 문을 닫거나 다른 회사에 흡수당했다. 업무의 전산화는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했고 결국 투자은행업계도 규모의 경제가 지배하는 새 시대를 맞았다. 미국 정부는 1973년에 예탁기관을 설립했다. 증권의 청산과 결제는 주로 증권거래소 자회사를 통해 진행된다.

이 사태를 겪으면서 투자은행들은 물론이고 NYSE와 다른 증권거래소들도 대규모 첨단장비 투자를 시작했다. 이는 투자은행업계에 규모의 경제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대형화와 M&A,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업공개를 촉발시키게 된다. 또, 컴퓨터를 사용한 업무방식의 변화는 투자은행 ‘경영’ 개념을 발생시키게 되었다. 시차를 두고 다수의 투자은행이 공개기업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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