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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스위스 은행비밀법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4-11-01 10:19:41

이 기사는 2024년 11월 01일 10:1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탈리아 서쪽 끝 항구 임페리아에 내려져서 니스에서 TGV를 타고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 제이슨 본은 ‘게마인샤프트은행’으로 들어간다. 본은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다. 어리숙한 모습으로 은행 직원들의 눈총을 받지만 본은 번호와 생체 인식만으로 비밀 대여금고에 안내된다.

영화에서처럼 스위스 은행들이 대여금고를 이름 없이 번호만으로 운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행 계좌는 10만 달러를 넣으면서 익명으로 개설할 수 있다. 히틀러도 개인 자산을 UBS에 맡겼다. 11억 제국 마르크 규모였다고 한다(당시 3억 달러). 아무리 비밀에 철저한 스위스 은행이지만 히틀러든 누구든 자기 이름을 쓸 수 없는 고객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은행은 고객의 신원을 어떤 방식으로든 알아야 한다.

스위스 3대 프라이드가 있다. 스위스 시계의 정확성, 스위스 초컬릿의 맛, 그리고 스위스 은행의 비밀이다. 다빈치 코드도 스위스의 한 은행에 보관된다. 스위스에서는 1900년대 초부터 은행 임직원이 고객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을 범죄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의사나 성직자에 준하는 의무다. 1934년 연방 은행법 시행 이래 그 의무를 위반한 사건은 4건 밖에 없을 정도다. 위반한 사람들의 실명까지 다 공개되어 남아있다. 2018년 스위스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그 ‘덕분에’ 스위스는 제네바, 취리히, 루가노에 글로벌 금융자산의 25%를 보관하고 있다. 6조 5천억 달러 규모다.

스위스 은행비밀법은 그 기원이 18세기 제네바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 상류계층 예금에 대한 비밀 누설을 불법으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1815년 빈회의에서 스위스가 영구중립국이 되자 유럽 전역에서 스위스로 자본이 밀려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군사 강국이었던 스위스는 프랑스, 스페인, 영국 못지않은 파워를 지니게 되었다. 은행이 아무리 고객 비밀을 지키고 싶어도 전쟁이 나거나 정치가 불안하면 어렵다. 스위스는 안성맞춤인 나라다. 그렇다 해도 개별 은행이 불안하거나 도산하면 또 다른 취약성이 생긴다. 스위스는 은행의 안정적 경영에 올인하는 나라가 되었다. 2023년 CS 사태는 뼈아프다.

전쟁 때는 스위스 은행 사람들이 주변 국가들로 가서 자기 은행의 안전성을 홍보하고 다녔다. 도로가 이어지지 않은 산악의 지하 안전 벙커 홍보도 빼놓지 않았다. 스위스는 전쟁 덕을 보기도 하는 나라다. 전시에는 각국이 세금을 올리기 때문에 부자들은 나라 밖으로 재 산을 빼돌리느라 바빴다.

2차 대전 때 스위스 은행들은 사실상 나치와 파시스트 편에 섰다. 전쟁이 끝나고 유대인들의 돈도 포함해 거액의 주인 없는 돈이 남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자산은 영구히 동결되었다. 전후에 구축국 편이었다고 해서 스위스는 괄시받기 시작했고 비밀 자금을 동결 해제 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잘 넘어갔다. 연합국측 인사들도 스위스 은행 신세를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종종 스위스 은행 기밀을 약화 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다 무위로 돌아갔다. 이유는 뻔하다. 전 세계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이념과 종교를 초월해서 한마음 한뜻인데 될 수가 없다.

2008년에는 고객 비밀 유출 범죄의 형량이 최대 징역 6개월에서 5년으로 높아졌다. 2017년 스위스 연방의회는 은행비밀 준수를 연방 헌법에 넣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밖에서, 예컨대 미국에서 진행되는 소송에서도 스위스 은행은 비밀을 준수해야 한다. 그에 위반하는 행동은 은행비밀법뿐 아니라 간첩죄까지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스위스 법무부의 입장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은행 비밀을 훼손하면 스위스 사회에서 배척당하게 된다. 취업도 끝이다. 한 마디로 스위스 국민 정서에 반한다.

스위스는 국익 차원에서 이렇게 하는지 몰라도 전 세계의 온갖 검은돈이 편리하게 갈 곳이 있게 되는 점이 문제다. 돈세탁은 물론이고 테러리스트들의 자금 운용, 독재자들의 검은돈 등등 모두 스위스가 피난처다. 필리핀의 마르코스도 스위스에 돈을 두었다가 결국 2004년 에 환수당했는데 필리핀 법무부에 전달된 액수가 6억8300만 달러였다. 30년 동안이나 권좌에 있었던 자이레의 독재자 모부투의 경우 300억 달러의 자금을 조성해 정치,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최근까지도 루머와 스캔들이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스위스가 마치 범죄자들을 두둔하는 것 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스위스도 금융범죄를 포함해 범죄에 엄한 나라다. 단지 은행비밀을 누설할 수 없다는 것 뿐이다. 예컨대 스위스는 미국과 사법공조, 범죄인인도가 잘 되기로 유명한 나라다. 미국인들이 스위스 은행계좌를 통해 범죄를 많이 저지르기 때문이다. 또, 스위스인이 범죄에 미국 금융기관을 경유하면 미국이 관할권을 가진다.

고객의 정보를 기밀로 유지하는 과정에서 스위스 은행들은 다른 나라 정부에 종종 벌금을 내야 한다. 해당 고객이 본국에 납부해야 할 세금을 탈루했다는 혐의가 있는 경우다. 최근에도 스위스 은행들이 총 120억 달러를 외국 정부에 납부했다는 자료가 있다. 이 때문에 2022년부터 스위스 은행들은 범죄에 연루된 경우만 아니면 고객의 비밀을 지키는 과정에서 해외에 납부한 벌금에 대해 본국에서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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