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4년 07월 02일 18:4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한국의 신용평가업이 태동 3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동양그룹 사태가 촉발한 금융감독원의 검사 결과 경영진과 평가담당 임원들은 물론이고, 신용평가 업무의 최 일선을 진두지휘하는 '장수'급인 평가실장들까지 집단적으로 중징계를 받을 판이다. 일부에서는 '검은 커넥션'이 드러났다며 신용평가사들을 범죄집단으로, 신용평가사 애널리스트를 범죄자 취급하고 있다.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고, 잘못한 이는 혼나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바로 선다. 신용평가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징계의 사유와 수준과 범위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금융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인 신용평가 전체를 마치 도적떼 일망타진하듯 해서는 곤란하다. 자칫하면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징계 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의뢰기업에 대한 신용등급의 사전 통보와 공시 지연이다. 신용평가 절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매우 큰 잘못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애매한 구석이 많다. 신용등급을 의뢰한 기업에게는 '소명의 기회'라는 정당한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S&P나 무디스 같은 글로벌 신용평가사들도 신용등급을 세상에 공개하기 전에 의뢰기업에게 미리 알리고 소명의 기회를 준다. 당국이 금융회사를 징계하기 전에 잠정 통보하고 소명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금융시장에서 공개적으로 돈을 빌리기 위해 신용등급을 받는 것인데, 가능하면 높은 등급을 받고자 하는 게 당연하다. 평가사가 등급을 낮추려고 하거나, 예상보다 낮은 등급을 준다면, 대부분 기업은 담보가능한 자산이 더 있다거나, 좀 더 설득력 있는 구조조정 계획을 제시하겠다거나 등등 신용평가사를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신용평가사든 의뢰기업이든 소명의 기회는 신용평가 절차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신용등급은 회사의 재무비율을 몇 가지 공식으로 조합해서 뚝딱 만들어내는 수학이 아니다. 상환능력은 재무제표로만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회사가 향후 얼마나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지, 긴급할 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의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금융기관이나 대주주 또는 모기업에서 긴급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은 얼마인지 등등을 종합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이에는 고도의 전문가적 통찰력과 판단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신용등급은 '법칙'이 아닌 '의견'이고, 신용평가사를 금융시장의 언론이라고 한다. 제대로 의견을 내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자료를 분석하고, 가능한 많은 대화를 의뢰기업과 해야 한다.
의뢰기업에 대한 신용등급 통보와 대중에 대한 공시에도 당연히 질서가 있어야 한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오랜 역사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그리고 시장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규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 신용평가사에게는 아직 제대로 된 매뉴얼이 부족하다. 금융당국 주도 하에 이제 그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규정보다는 30년 간 문제없이 이어져 온 관행이 몸에 배어 있다. 기업과 통정해 신용등급을 미리 통보했거나 투자자에게 피해를 줄 것을 알고도 공시를 고의로 늦춘 명백한 잘못과, 잘못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어려운 사례들이 섞여 있다. 코걸이인지 귀걸이인지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얘기다.
세 곳 신용평가사의 기업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부서의 대부분 실장급이 징계자 명단에 올랐다. 사람이 아니라 회사(회사의 내규 또는 관행)가 문제라는 뜻이다. 이 사람들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사람들로 그 자리를 메워도 똑같은 일이 재연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징계 사유 중에는 동양그룹의 신용등급을 적정하게 매기지 않아서 투자자의 손해를 초래했다는 것도 있다고 한다. 신용등급의 적정성을 금융당국이 판단했다는 것인데,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신용평가사들이 방법론을 무시하고, 틀린 등급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잘못된 등급을 줬다면 모를까 신용평가사의 고유영역인 신용등급을 당국이 판단하는 건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더구나 동양그룹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은 오래 전부터 투기등급이었다. 상환불이행의 위험이 있으니 투자에 유의를 해야 한다고 신용평가사들이 등급으로 말해 왔던 것이다. 물론 시장의 기대에 비해 등급 조정이 늦거나 약했을 수 있지만, 그건 시장과의 문제이지 당국의 영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징계의 부작용으로 가장 염려되는 것이 획일화이다. 평가사들은 규제가 두려워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평가사와 차별화된 등급을 내지도 않을 것이다. 같은 기업에 대해 신용등급이 다르면 그 중 하나는 부적정한 등급이 될테니 차라리 세 쌍둥이가 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애널리스트들은 전문가로서의 통찰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그저 방법론대로 읊어대는 앵무새에 그칠 것이다. 의뢰기업과 소통은 가급적 자제할 것이다. 정당한 소명에도 귀를 닫을 수 있다. 손해보는 건 의뢰기업과 투자자들이다.
만약 당국이 신용평가업의 선진화를 위해 강수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방향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2011년 도입하려다 금융당국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로 무산된 독자신용등급의 도입이 우선이다. 평가방법론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어 평가절차의 투명성을 높이고 신용등급의 적정성을 높일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국내 신용평가시장이 세 평가사의 과점 시장이라 생긴 문제라면 제4, 제5의 신용평가사를 육성해 수수료나 관계가 아닌 신용평가의 질로 경쟁하는 시장으로 유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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